세상이야기

[스크랩] 선조수정실록 편찬 배경

하피즈 2008. 1. 16. 07:15

1.붕당의 시작

 

사림세력은 선조대에 오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때 사림세력 내부의 정치철학과 정국운영 방침을 둘러싼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붕당을 구성하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림세력 안에는 명종 초, 후기에 관직에 나온 선배격 사류와 선조대부터 관직에 나온 후배사류의 두 계통에 존재하고 있었다. 과거 권신들과의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선배사류와 기성 관료화 된 선배사류에 반발하는 후배사류의 갈등이 이후의 분당의 근간이 되었다.

 

선, 후배사류간 갈등이 최초로 발생한 계기는 당시 외척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가지고 있던 심의겸을 둘러싼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심의겸은 사림의 진출 초기에 사림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왔고, 권신계의 사화 움직임을 막아내는 등의 많은 공을 세워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선배사류가 외척인 그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조정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강력히 반발하며 이를 저지하였고 이때 심의겸을 지지하는 선배사류와 김효원을 지지하는 선배사류의 일부 원로들과 후배사류로 갈라져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선조8년에 재령 지방에서 주인을 죽인 노비를 처벌한 일이 있었는데 후배사류가 이 옥사를 잘못 처리했다며 당시 좌의정이며 심의겸의 세력이던 박순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정철, 윤두수 등 선배사류는 이를 자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키려는 시도로 보고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해 후배사류의 다수를 관직에서 쫓아내버린다.

 

사림 내부에 이렇게 내분이 벌어지자 당시 부제학이던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과 의논하여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보낼 것을 청하였다. 심의겸이라는 짐을 벗고 후배사류의 과격함을 우려하는 임금의 지지를 업은 선배사류는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면서 후배사류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세력을 늘리는데 힘을 쓴다. 이때부터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류는 서인,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류는 동인으로 불리우며 본격적으로 붕당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2. 남, 북인의 분열

 

동, 서인의 분열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은 윤두수, 윤근수, 윤헌의 3명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직되면서 주도권을 동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인이면서 동인의 편에 섰던 정여립이 모반에 연루되면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때 조사를 담당한 정철은 수많은 동인을 숙청하게 된다.

 

서인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된 시점에 이번에는 이른 시기에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하는 정철이 파직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철의 처분을 동인이 맡으면서 그의 처분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서 의견충돌이 벌어진다. 이때 강경파는 북인으로, 온건파는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 북인 분열 이후 북인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일 강경파로서 주도권을 잡게 된다. 왜란이 끝나면서 이번에는 전란중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적통인 영창대군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와 전란중 광해군과 함께 활동했던 일파가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때 광해군을 지지한 세력은 대북, 영창대군을 지지한 세력은 소북이 되었는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3. 인조반정

 

대북파는 정권을 장악했지만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기반이 약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바로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고 여기서 대북은 이언직과 이황을 비판하는 회퇴변척 논쟁을 벌인다. 이때부터 서인과 대북의 갈등이 심각해졌고 이후 대북이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후금과 친목을 다지는 등의 정책을 취하자 결국 불만이 폭발한 서인은 남인과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북인세력을 몰살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4.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편찬


광해군 즉위후 1년뒤(1609년) 실록청이 설치되면서 선조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기록의 손실이 심각했고 특히 임진왜란 전의 기록은 매우 부족하여 개인의 기록과 야사를 긁어모아서 활용하였다. 이렇게 광해군 8년(1616년)에 선조실록이 완성되게 된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곧바로 실록의 수정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한다. 그러나 이괄의 난과 양차 호란에 의해 인조 19년(1641년)에 가서야 실록수정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수정실록은 효종 8년(1657년)에 완성되었다.

 

 

5.두 실록의 내용상 차이점

 

선조실록은 북인, 넓게는 동인의 세력하에 편찬된 실록으로서 동인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실록이다. 남인의 사상적 기반이 된 이황에 대해서는 간단히 서술되었고, 특히 이이에 대한 비판이 많으며 정철에 대해서는 인간쓰레기 수준의 격렬한 비난이 많다. 또한 대북의 핵심인물이던 정인홍을 높이 평가하고 동인의 대숙청을 불러왔던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수정실록은 이황과 이이를 최고의 학자로서 높이 평가하고 정철을 강직하고 지조있는 선비로서 평가하였다. 반면에 정인홍은 성질이 사납고 괴팍하며 타협을 모르는 소인배로 비하하고 정여립 사건에 대해서는 정여립의 인물됨과 사건의 경위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여 서인의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참고자료: '택당 이식의 학문성향과 남명학 비판' (정인선, 경상대 교육대학원)

               '정정(政正) 제13집 중 ; 선조실록 수정편찬의 정치사적 의미'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한국사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우연히 자주 다니던 카페에서 어떤 분이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선조실록에는 없고 수정실록에는 나와있다는 글을 올리신 것을 보고 관심이 있어서 찾아본 내용입니다.

출처 : 정이형 선생을 기억하며
글쓴이 : 정이형 선생 원글보기
메모 : 선조실록 수정편찬의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