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스크랩] 한국역사연구회 <정여립 역모의 후폭풍 기축옥사/ 신병주>를 읽고

하피즈 2008. 1. 16. 12:59
한국역사연구회 <정여립 역모의 후폭풍 기축옥사/ 신병주>를 읽고


                                                                                           열락연재      박희용


 <결론 부분에서, '특히나 동인과 서인의 붕당정치가 심화되어가는 시기 그의 반대파인 동인들에게는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라는 문장 중 '그의 반대파인 동인들에게는'이 아니라 '그의 반대파인 서인들에게는'이지 않나? 정여립은 숙청을 당한 동인이었고 송익필, 정철 등은 옥사를 일으킨 서인이었다.>


 기축옥사에서 이이와 성혼, 송익필 등의 서인 학문과 학맥의 잘못을 볼 수 있다. 기축옥사 이후의 조선 역사에서 서인 기호학파 학문과 세력이 계속해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의 강고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한 국가 경영책으로 결국 조선은 쇠약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특히 조선 중기 효종 대에 우암 송시열이 등장하여 사상계와 관료계를 장악하고 그 후학들이 200년 이상 득세함으로써 조선은 환골탈태의 마지막 기회를 잃고 망국하였다. 主理論이란 같은 입장이면서도 퇴계학은 비주류이고 율곡학이 주류였으니 조선 망국과 식민지, 분단과 전쟁의 근본책임은 주류였던 율곡학에 더 많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율곡집을 읽어보면 확고한 중심 사상이 없이 자주 표변하는 경우와 논리가 전후 상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퇴계학은 진지한 학문적, 학자적 태도와 지향점을 갖고 있다.

 율곡은 현실을 중시하는 경세가였고 퇴계는 정신을 중시하는 학자였다. 율곡학은 형식적, 관료적이랄까 일정한 규격성과 틀을 강조하는 그런 흐름을 갖고 있고 퇴계학은 이성을 중시하지만 인간, 또는 학자적 태도를 강조하는 흐름을 갖고 있다. 율곡학과 그 후학들, 서인-노론은 현실을 중시하다보니 치국평천하의 길로 나갔고 퇴계학은 수신제가라는 내면 탐구와 수양의 길로 나갔다.

 수신제가를 완성하지 않고 대충 수습한 뒤에 치국평천하의 길로 나가면 결국 인성의 기초가 부실하여 반드시 붕괴하거나, 그 붕괴 위험성과 허술함을 위장하기 위하여 아집과 편견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 아집과 편견은 자기 학문과 당파의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학문적, 정치적 반대파들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왜냐면 상대성을 인정하면 자기 존재의 부실함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문난적’이란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사상과 학문, 나아가 나라 전체를 자기들의 이익에다 옭아매고 말았다.

 기축옥사 하나만 보더라도, 임진왜란을 불과 3년 앞두고 일어난 이 옥사에서 장차 보국안민의 동량이 될 아까운 인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설혹 겨우 죽음을 면하고 목숨은 붙어있더라도 국난을 극복하는데 보탬이 될 길이 막혀있었지 아니한가. 필자가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축옥사 자체가 교활한 송익필 등의 술수에 의해 억지로 꾸며진 ‘반역음모’였지 아니한가. 송익필, 정철 등의 서인 세력들은 불과 3년 뒤에 닥칠 미증유의 국난을 전혀 내다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자기들 당파의 이익과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소인배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많은 인재가 희생을 당했지만 동인 세력들은 임진왜란 전 기간 동안 광해군왕을 중심으로 한 전쟁내각의 책임을 맡아 결국 왜적을 물리쳤다. 특히, 기축옥사에서 희생된 남명학파 인사들은 국난 기간 동안 맹렬한 의병 활동을 통해 역사적 정당성을 실천하고 증명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서인 세력은 평화기에는 자파의 이익만을 탐해 타 당파를 박해하다가도 국난기에는 몸을 사려 뒷전에 돌고, 다시 안정기가 되면 정권 장악에 혈안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는 이순신 장군을 가만두다가 왜적이 물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이순신을 제거하려 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최전선에 서게 한 것은 전형적인 권력소인배들의 행태인 것이다. 삼 십 여년 후의 정묘, 병자호란조차도 숭명 사대주의에 찌든 서인 세력들이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좀 더 국제 정세를 분명하게 읽고 유효한 대응을 하였다면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호란이었지 아니한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외적의 침입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것은 양반 귀족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정여립의 사상은 학문적, 역사적 당위성을 가졌다. 정여립의 ‘군주세습제’ 반대 사상은 동 시대 유럽의 사상, 정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정여립과 그의 동지들이 품었던 생각은 지구적, 인류적 문화 발전 단계에 적합한 것이었다. 정여립의 사상이 제대로 자리 잡았다면, 프랑스, 영국 등의 서유럽 선진 국가들과 같은 민주주의 발전 단계의 길을 밟아 지금쯤 우리나라는 멋진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조선조 때의 아무리 유위유능한 학자나 사상가라 할지라도 전제군주제를 긍정 또는 묵인하고서는 참된 학자, 선비라고 할 수 없다. 정여립과 그의 동지들이 품었던 생각, 확대하여 동인들의 생각이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다.

 오늘날, 유학이 조선 망국의 원인이고 현대에 적용하기엔 고리타분하며 부적합하다는 일반적 평가를 받는 까닭이 율곡학 보다는 퇴계학 쪽에 조명되어 있는데, 외려 율곡학 쪽에 문제의 소인과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율곡학과 서인세력이 역사에 끼친 공과를 냉철하게 보고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 하다.

 ‘유학’이란 말의 의미를 우활하게 보편적으로 보지 말고, 이제는 분석적, 개성적으로 보아야 한다. 넓고도 넓은 동양정신의 바다, 유학은 가히 태평양이다. 그러나 태평양이라 해서 모두 동질의 바다가 아니다.

 오대양이란 이름은 별도로 존재하지만 결국 지구의 바닷물은 오대양을 순회하고, 넓디넓은 태평양이지만 일정한 지역마다 바다 이름이 달리 있다. 그러면서도 태평양이란 이름 속에 포함되어 바닷물의 순회를 받아들인다.

 유학의 다양성을 조선의 학자들이 깨우쳤다면, 지구는 넓고 모든 바닷물은 순회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치를 알았다면 결코 조선은 망국하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좁아지니 학문이 좁아지고, 학문이 좁아지니 나라가 좁아져서 결국 그 피해와 고초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되고 말았지 아니한가.

 정철, 고등학교 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배우며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다. 그 때는 연군을 노래하는 지극한 충신이요 대단한 문학자로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을수록 그의 정체를 깊이 알게 되어 씁쓸한 느낌이 짙어진다. 정철이 노래한 사미인곡은 결국 왕의 총애를 담보하기 위한 미사려문임을, 문재를 이용해 왕의 마음을 얻고자하는 위장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즉, 매문의 대가였단 인물평이다.

 정철은 사미인곡을 지을 정도로 충성스런 신하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후학들은 분명 16세기 초부턴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었다. 율곡과 송익필, 성혼과 정철, 김장집과 송시열 등 서인계 후학들은 왕권보다는 신권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군왕이란 존재는 선현인 율곡에 비해 형편없이 학문이 낮은 자로써 전제정치체제의 틀을 유지하는 한갓 대표적 상징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서인, 노론이라는 당권과 율곡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만이 필요하였다, 그것도 율곡의 본의를 제대로 모르는 채로

 역사는 카오스 상태로 시작하지만 전개 과정에서 차차 굳어져 마지막엔 확고한 현실이 된다. 그 ‘확고한 현실’이 정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 하는 잣대는 백성들에게 있다.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 주는 ‘확고한 현실’만이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외침과 조선 망국, 그리고 식민지, 분단, 전쟁이라는 ‘확고한 현실’, 과연 어디에 누구에게 그 근원이 있는가를 천착하는 노력이야말로 이분법적 흑백논리 차원을 초월하여 역사를 바로 보고자하는 자로써 가져야할 자세가 아닐까. 그래야 역사가 거울이 될 수 있지 아니할까.


             (2007년 12월 13일)

출처 : 정이형 선생을 기억하며
글쓴이 : 나루 원글보기
메모 : 주리론,율곡학과 퇴계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