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살(1551년)
명종 6년. 대를 이을 왕자(宣祖)가 태어나자 사면이 있었는데, 송강의 아버지도 사면을 받아 유배가 풀렸다. 이에 송강의 아버지는 송강을 데리고 친산이 있는 창평현(昌平縣, 지금의 담양 고서)의 당지산 기슭으로 내려와 살게 된다.
그 해 여름, 순천에 있는 중형을 만나러가던 중에 환벽당의 사촌 김윤제선생을 만났다. 이후 27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10년여 동안 이 곳에서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송촌 양응정,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인들을 스승으로 배웠으며, 김성원, 고경명들과 교유하였다.
* 17살(1552년)
명종 7년.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의 주선으로 사위인 류강항(柳强項)의 딸 문화 유씨와 결혼한다.
* 21살(1556년)
명종 11년. 율곡 이이와 처음 만나 교우의 도를 정한다.
* 26살(1561년)
명종 16년.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적어도 이 해 이전에 우계 성혼과 교우의 도가 맺어졌다.
* 27살(1562년)
명종 17년. 문과 별시에서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순조롭게 출발한 벼슬길이었으나 명종 임금의 사촌형 경양군의 옥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어린시절의 소꼽친구였던 명종으로부터 선처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강직한 원칙주의자로 이를 거절하여 수년 동안 좋은 벼슬길에서 소외되었다.
이후 30살 때까지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 예조의 정랑에 제수되었고 요직에 나아가지 못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 30살(1565년)
명종 20년. 한 달여 동안 경기도사에 제수됨.
* 31살(1566년)
명종 21년. 형조정랑,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 역임하였고, 1월에 형조정랑 자격으로 궐정에 참여하여 을사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무고함을 밝혀 줄 것을 건의하였다. 3월에 인조의 귀인이었던 맏누이의 상을 당해 곡하다.
9월에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하던중 우연히 시조 한 수를 짓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명종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하여 오래도록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월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홍문관에 들어갔다.
* 32살(1567년)
선조 즉위하자 벼슬살이에 새로운 전기를 맞기 시작.
10월에 이르러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된 인사들이 석방되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아버지 판관공의 직첩이 다시 회복되고 11월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직후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뽑혔다.
* 33살(1568년)
선조 1년. 3월에 이조좌랑의 요직에 임명되었고 6월에 원접사 박순의 종사관이 되어 시인으로써 재질을 발휘하였다.
* 34살(1569년)
선조 2년. 5월에 홍문관 수찬, 교리,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즈음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기존세력들이 사림계 인문 17인을 논죄하고 조정에서 내쫓으려 하자, 임금 앞에 나아가 그들을 통렬히 논박하였다.
* 35살(1570년)
선조 3년. 교리,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1572년) 되던 해 6월까지 만 2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때 모든 의례와 절차를 스승과 벗들에게 물어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주위의 큰 칭송을 받았다.
* 37살(1572년)
선조 5년. 7월에 시묘살이의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 38살(1573년)
선조 6년.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함.
4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40살(1575년) 되던 해 5월까지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때에도 예를 다하여 주위에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 40살(1575년) : 첫 번째 낙향
선조 8년. 6월에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내자시정, 사인으로부터 홍문과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동서(東西)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서인의 주요 인사로 지목되어 동인과 대립이 심하자 마침내 율곡에게 조정의 화합을 부탁하고 창평현(담양)으로 낙향하였다.(첫번째 낙향).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장차 크게 등용하겠다고 만류했으나 끝내 낙향을 택한다.
이로 인해 이 해 10월 이후 42살(1577년) 되던 해 10월까지 약 2년간 주로 창평현에서 생활하였다. 낙향 기간 중에도 선조로부터 계속해서 여러 관직을 제수받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 42살(1577년)
선조 10년. 11월에 계림군에게 출가했던 막내 누님이 죽자 고양군 신원에 와서 지냄. 같은 달에 인성왕후(인조의 왕비)가 세상을 뜨자, 대궐에 들어가 상에 임하고 이어 송익필을 만나 거취를 상의하기도 한다.
* 43살(1578년)
선조 11년.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11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그 즈음에 벌어진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 옥사 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으로 탄핵을 받아 직무가 바뀌었다.
12월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지에 제수되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 44살(1579년) : 두 번째 낙향
선조 12년. 5월에 형조참의, 6월에 우부승지, 8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고 만다.(두 번째 낙향)
* 45살(1580년)
선조 13년. 1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관동별곡>, <훈민가>등을 지었다. 관찰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도내 여러 폐단들을 시정, 개혁하고, 영월 땅에 표석도 없이 버려진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며, 지방관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을 짓기도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강원도 내 민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 46살(1581년) : 세 번째 낙향
선조 14년. 관찰사의 외직에서 돌아와 2월에 참지, 4월에 대사성에 제수됨. 6월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승 노수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신하의 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을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합당치않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과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세 번째 낙향),
그러나 12월에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특히 도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 개혁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칭송 받는다. 그 무렵 전라도사로 있던 조헌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된다.
* 47살(1582년)
선조 15년. 9월에 임금의 특명으로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정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되고 12월에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된다.
* 48살(1583년)
선조 16년. 2월에 예조참판, 3월에 특명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승진되었다. 4월에 평소 술을 즐겨 위신을 잃는 일이 많고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입었으나 선조가 비호한다.
다시 4월에 지돈령 부사, 6월에 동지 성균관사에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8월에 임금과 대면하여 교만한 동인세력의 인물들을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여 결국 뜻을 이룬다.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되고 9월에 동인세력을 죄로 다스린 일로 계속 간원들의 논핵을 받지만, 임금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는다.
* 49살(1584년)
선조 17년. 1월에 더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곡하며 애도의 시를 짓다.
2월에 대사헌 겸 예문제학에 제수되며, 곧이어 찬집청 당상으로 차출되고 8월에 지의금부사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에 선조는 총마를 특사하여 출입시에 타고 다니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라고 불렀다. 12월에 다시 특명으로 승진하여 승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지 경연사에 제수된다. 선조의 총애가 더할 나위 없이 두터운 시기였다.
* 50살(1585년) 네 번째 낙향
선조 18년. 3월에 판돈령으로 직무가 바뀌고 4월에 동인들로부터 논핵을 입으나, 임금이 비호한다. 8월에 이르러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입고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가까이에서 계속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하였다.(네 번째 낙향),
이후 54살(1589)되던 해 10월 초까지 4년여동안 향리인 창평을 근거지로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이 기간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 51살(1586년)
선조 19년. 10월에 조헌이 상소하여 이이, 성혼, 박순과 함께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노력한다.
* 52살(1587년)
선조 20년. 3월이 이귀가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애쓴다. 이 해와 다음 해 사이의 기간에 특히 <사미인곡>,<속미인곡>을 지었다.
* 53살(1588년)
선조 21년. 조헌이 재차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한다.
* 54살(1589년)
선조 22년. 7월에 사암 박순의 죽음에 곡하며 추도의 시를 짓는다. 8월에 맏아들 기명의 죽음으로 복을 입고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아들의 장사를 위해 경기 고양에 올라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린다. 선조는 충절로서 일컬으며 가상히 여기고 이어 기축옥사가 벌어지며,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되었다. 낙향한 지 4년여만에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한다.
* 55살(1590년)
선조 23년.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함. 3월에 다시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하며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다한다.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하고 인성 부원군에 봉해진다.
* 56살(1591년)
선조 24년. 2월에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사직서를 올리자 체임됨. 3월에 용산촌사로 물러나 명을 기다린다. 윤 3월에 이르러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논핵을 입고 파직된다.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여 처음에는 명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곧 이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리고 또 사흘 만에 북녘 땅 강계로 유배되어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쳐지는 혹독한 위리안치의 귀양살이를 한다. 이 기간 중 대부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낸다.
* 57살(1592년)
선조 25년. 4월 중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모신다. 9월에 충청, 호남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이 무렵 조헌의 순국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어 곡함.
* 58살(1593년) : 송강 정철의 죽음
선조 26년.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와서 5월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 출발에 임하여 임금께 글을 올려 국난에 임한 충정을 간절히 드러낸다. 귀국 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 같이 송강의 일행으로부터 나온 거짓 보고 때문에 엉뚱한 모함을 입어 사면을 청하고 강화 송정촌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당장의 끼니조차 꾸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깊은 시름을 안고 지내다가 마침내 12월 18일 강화 송정촌 거처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 송강의 사후 100년
송강이 세상을 하직한 이듬해인 1594년 2월에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장사된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65년(효종 6년)에 충북 진천군 문백으로 이장하였다.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나 1691년(숙종 17년)에 다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94년(숙종 20년)에 재차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