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정여립 모반사건 분석

하피즈 2008. 1. 17. 18:59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선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한 사건으로 보고,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처럼 기축옥사로 더 유명한 정여립 모반 사건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 발생한 조선사 최악의 정치 모략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규모와 정도를 넘는 사대부의 피해는 조선 4대 사화의 희생을 합친 숫자와 비견될 뿐만 아니라, 정여립의 고향이었던 전주는 반역의 향으로 찍혀 조선 왕조의 집단 따돌림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정여립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면 변화에 대한 조선 사회의 무의식적 거부감과 내부 모순을 극복할 여력을 잃어버린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훈구 척신 세력을 청산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조선 선조 대에는 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혼란과 사회 전 분야의 개혁을 요구하는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원래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기득권은 이런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고 선조 자신 또한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과 개혁 역량 미비로 사회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당파싸움은 상호간 증오를 바탕으로 한 전면전 상태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동인이 장악한 조정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선조는 초조해했고, 뭔가 정치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 때 마침 전라도 전주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비밀 상소가 올라온 것입니다.

정여립은 동인이었고 정여립이 추진 중인 대동계는 성리학 질서에 명백히 반하는 불순사상이니 상소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평소 정여립은 선조가 갖고 있는 소인배적 기질과 군왕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있었음으로 선조와 서인측은 일시에 조정을 쇄신하고 요동치는 민심을 가라앉힐 계기로 이 사건을 충분히 이용하였습니다.

선조와 서인의 도살꾼으로 불린 송강 정철, 송익필이 주도하여 동인계 전라도 유림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가 시작됩니다. 사건 당사자인 정여립, 이발, 정개창, 정언신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비들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이들의 사지를 전국 팔도에 보내 역모를 꾀하고자 한 죄인들의 말로를 일반 백성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주입시켰습니다.

사건이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중세 마녀 사냥을 연상시킬 정도로 서인은 정여립과 일면식도 없는 동인계 선비들을 무리하게 엮어 넣어 주살하였습니다. 눈이 아파 눈물을 보여도 정여립 때문에 운다고 하여 처형된 사람, 임지를 옮기면서 정든 여인을 그리워하여 보인 눈물도 정여립 때문이라 하여 능지처참된 관리가 있었다 하니 정도를 넘어선 왕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공화주의자 정여립]

정여립은 동래 정씨 희증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다.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는데,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이에 일세의 이목이 정여립에게 집중되고 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는데,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샀다.

상소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어 마침내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선조 20년의 일인데 이로 인해 당시 동인이 쥐고 있던 삼사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간 해이기도 하다. 여립이 서인을 공격하게 된 연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는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하고,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여립은 그 후 진안 죽도 천반산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시회를 여는 등 날로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이들은 임진년에 있을 변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정여립의 대동계 무사들이 동원되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훗날 여립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은 이 대동계가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 하여 모반 음모로까지 연결지어버리지만, 오히려 호국정신이 깃든 우국충정의 단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쨋든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잡혔다.

이 때 정여립은 변숭복이 이 사실을 알려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명에 숙청된 이들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명성은 역모라는 이름 하에 묻혀지고 말았다.


[조작설]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했고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단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정여립 사건은 서인에 의해 이루어진 모함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참설에 전해져 오는 '여립이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네 아이를 죽였다.' 는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제비나 찢어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구전은 그의 모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서신 문서들을 집안에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동인의 무리들을 죽게 할 리 없다.

또 급보를 받고 도망간 곳이라면 과연 죽도를 택했을까? 이미 그는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 선생'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깊은 산을 두고도 연고지를 택했을까?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정여립의 자결이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치고 나서 칼자루를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하는데 그 동안 관군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동소만록>같은 야사에서는 '여립이 진안 죽도로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살해한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 고 전해지는데, 기축옥사의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정철이 그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는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지휘한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있었는데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 송익필이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명을 환천시키고자 했으나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작에 동참한 것이라 보여진다.


[모반설]

정여립이 남긴 문장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사비군이란 말은 그 당시 사회 통념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여립이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목자(木子= 李씨)는 망하고 존읍(尊邑= 鄭씨)은 흥한다."

"요동에서 바라보니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나와 보니 전라도 땅 남문 밖에서 뻗었다."

"정팔룡이라는 신기로운 용맹 있는 사람이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존읍(尊邑= 鄭씨)은 그를 가리키고 그의 어릴 때 이름이 팔룡이며, 그의 출생지는 남문 밖이다. 정여립이 이 낭설을 퍼뜨려 믿게 한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무'에서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적들의 문서 중에 정여립이 하늘에 제사 하는 제문이 일곱 장이나 나왔는데, 임금의 죄악을 말함에 있어서 특히 흉하고 참혹하였다." 그리고 여립은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이행을 기도하였다 한다.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이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으나 역모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여진다.


................................................................................

최근에 한나라당 최대표가 자기의 12대 조상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1584년) 때 무고로 옥사하였다고 언론에 말하는 것을 보면 정여립 사건이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역사(반역)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또 요즘 떠오르는 전주 출신 정씨를 바라보는 눈들도 심상치가 않은데 기축옥사가 재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국민의 힘으로 소수 정치인들에 의해 역사가 조작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겠습니다..

출처 : 네이버 백과 <기축옥사 바로 알기>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에도 대운하가 있었다...  (0) 2008.01.31
송익필  (0) 2008.01.30
정여립 인물기술  (0) 2008.01.17
정여립 모반사건 요약  (0) 2008.01.17
예송논쟁 배경...송시열/이덕일박사  (0) 2008.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