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읽고싶은 책 한 권>마음의 사회학

하피즈 2010. 7. 31. 15:20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에는 주로 인근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저에게 도서관은 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도서관은 시험이나 입시 공부를 하는 일종의 면학 공간이었습니다. 도서관은 본래 책을 읽고 사색하며 연구하는 곳입니다. 제도화된 입시 교육이 요구하는 일방적 암기와 반복을 통한 '국가가 필요로 하는 획일적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은 아니지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면 컴컴하고 음습한 암실에 칸막이를 친 책상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요즘 도서관의 풍경은 예전과 사뭇 다릅니다. 장서의 종류와 양은 물론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하며 도서관 본연의 기능을 해가고 있지요. 그런데 새로운 풍경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뭔가 심각하고 두꺼운 서적과 토익 참고서를 들고 아침부터 저녀까지 열공하는 고시형 인간들의 출현입니다. 남녀는 물론 20대 초반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들이 각종 시험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국가에서 치르는 이른바 고시에 '몰빵'하는 고시족들입니다. 90년대 전에 만해도 전혀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지요. 

 

  7,80년 대만 하더라도 절간 구석에 틀어박혀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소위 3대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간혹 보곤 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버거운 형편에 고시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꽤 모험이이기도 했고 그 수도 사회적 문제가 될 만큼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90년대 IMF를 거치며 좋은 시절이 지나자 너도 나도 '철밥통'을 찾아 고시촌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신림동을 중심으로 생긴 고시원들이 21세기형 쪽방들이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대학 도서관에도 국공립 도서관에도  공인중개사에서 교원, 경찰, 소방, 말단 행정에 이르기까지 공무원을 향한 엑소더스가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만듭니다. 오로지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평생 밥벌이를 위해 몰려든 경제적 난민들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가장 영리한 사람들일 지도 모릅니다. 시험 한 번  통과하는 것으로 시험 이후의 인생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니까요. 도박치고는 꽤 승률도 높고 댓가도 짭짤합니다. 경제적 효율의 논리로 따지면 '고시'는 투자대비 '이익'을 볼 때 정말 짭짤하게 남는 장사 임을 이들은 일찍부터 깨달았을 것입니다. 고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일종의 한탕주의로 변질되기 시작했지요. 아니  조선시대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통해 이미 검증된 방식입니다. 이보다 효과적인 사회적 계층 상승 방식은 단연코  없음을 수많은 고시족의 숫자가 증명합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 사회적 공복이 되는 자들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며  공무원이면 마땅히 알아야 할 기본 상식과 해커스 토익 문제집을 달달 외울지는 몰라도 이들에게 사회적 책임이나 이웃에 대한 연민같은 것들을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한 마디로 사회적 기본이 안되었다는 의심을 하는거죠. 이런 의심의 근거가 뭐냐구요? 그 어렵고 힘든 사법고시를 통과한 대한민국 검사라는 작자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눈여겨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시를 통해 벼슬하시는 분들은 생각과 수준이 달라도 한참 다르더군요. 떡값의 수준이 왠만한 사람 연봉 뺨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 주변에도 이런 식으로 고시를 통해 '용'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모두 똑같다고 볼 수 는 없지만 이들에겐 일종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희생한 시간과 공부의 비용과 대가를 사회가 마땅히 지불해하며 크건 작건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사고 방식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행위 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매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그들은 뭐가 잘못되었는가?반문합니다. 오히려 그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몰아내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듭니다. 사회적 부정과 불의에 대해 무감각하며 어떤 때는 법과 도덕에서 마치 자신만은 자유롭고 용인된 지위에 잇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어려운 문을 통과한 '고시패쓰자'이며 고시 통과가 일종의 사회적 면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겠다구요?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요.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보일 뿐 입니다. 하루 종일 책상에 붙어앉은 억압된 욕망을 고시합격 후에 권력과 부의 통해 보상받으려 합니다.  그런 음습한 이들을 대량으로 양성하는게 대한민국의 현 주소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청춘들이 고시라는 불꽃을 향해 달려들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사회가 나설 문제라고 보입니다.

  

  

 


 

김홍중 지음, 문학동네 펴냄, 2만원

 

타인을 누르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수치이자 슬픔으로 여겼던 감수성,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괴로워한 마음을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이른바 '진정성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와 함께 그 시대는 급속히 종말을 고했다.

웰빙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 정글사회. 사회학자 김홍중 대구대 교수는 그의 첫 저서 < 마음의 사회학 > 에서 이런 우리 사회를 스노브(속물)들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사회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 세계로의 이런 급작스러운 집합적 심리 전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진정성이란
에토스 자체와 그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김 교수는 라이어넬 트릴링의 '신실성과 진정성' 개념을 끌어온다.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 뉴레프트적 지식인들은 진정성과 반란을 동일시했다. '진정한 나'의 추구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한국 사회에서 그 접합은 민주화와 386세대에서 최고도로 구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정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적 진정성과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참여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내면의 참된 목소리'를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윤리적 진정성은 망설임이며 주저이며 때로는 실천적 무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들을 통해 구현되는 도덕적 진정성은 사회가 인정하고 규정한 행위 패턴이나 감정의 방식을 추종하고 모방하면서 집합체의 지배적 가치와 이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1997년 이후 체제가 도래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 둘은 전반적 시대정신의 결속력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분신으로 표출된 요절과 열사들의 탄생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이 추악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그때다.

1997년 이후 무한경쟁 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제적 생존 투쟁은 치부와 강박적 노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낳았으며, 상품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적 건강주의로 귀결됐다.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은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타락하거나 전도됐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

 
사유하는 능력을 회복하라

 
김 교수에 따르면, 스노브의 최대 특성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다. 김 교수는 스노비즘 최대의 스펙터클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상투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아이히만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회오·회심은 끝내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통제한 성찰성을 지녔던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했다. 하지만 그 성찰은 특정 지점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의 원천, 그 의미를 문제 삼지 않는 도구적 성찰에 머물렀다. 성찰 자체를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스노보크라시하의 자기계발 담론들이 명령하는 도구화된 성찰성, 그 영악함도 아이히만의 그것을 닮았다. 김 교수는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윤리적 비판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만 비판의 주체 스스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스노비즘 비판 자체가 또 다른 스노비즘으로 전락하는 역스노비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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