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니들이 고추냉이 맛을 알아?

하피즈 2011. 8. 6. 15:37

 

 

 

 

 

1.  맛 또는 향?

 

혀 끝에 착 달라붙어 코 끝을 톡 쏘는 향기로 입 안을 알싸하게 만들다

머릿 속을 꽉 채우는 느낌으로 눈물 한 방울 찔끔 나게 만드는 매운 맛.

콧구멍을 맨소래담으로 개통한 기분. 

매운 맛이긴 한데 뜨거운 고추의 매운 맛과는

다른 차가운 매운 맛... 

개운하면서도 얼얼하지만 그렇다고 혀끝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맛이라기보다는 향에 가까운 느낌

매운 맛Taste…

아니 향Sc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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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정체는 무엇이냐?

 

고추냉이는 ‘와사비’라는 일본 명칭으로 더 익숙하다.

이름에 고추가 들어가 맵다는 것은 알겠고 고추의 친척 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녀석은 겨자의 사촌, 양배추의 가족이란다.

서양 고추냉이 Horseradish가 있고 와사비Wasabi 라는 두 종류의 고추냉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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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고추냉이

 

서양 고추냉이는 서아시아 출신이다. 

중세 이전까지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다가 이후 향신료로 쓰기 시작했다.

와사비라 불리는 고추냉이는 사할린과 일본이 원산지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70년대에 들어왔으니 토종 맛은 아니라는 말씀…

말하자면 수입 농수산물이다.

임진왜란 때 들어와 18세기나 되서야 널리 보급된 고추도 엄밀히 따져 토종 맛은 아니다.

자장면의 운명처럼 한국 음식으로 어엿하게 자리잡은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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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몸

 

 

서양 고추냉이와 고추냉이-와사비-는 

둘 다 겨자의 먼 친척 뻘이고 뿌리를 갈아 먹으며 톡 쏘는 맛과 향이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좀 다르다.

서양 고추냉이의 뿌리는 연한 갈색을 띄지만 고추냉이는 울퉁불퉁한 생김새에 초록색 뿌리와 육질을 가졌다.

서양 고추냉이는 흔하고 값도 싸지만 고추냉이, 와사비는 비싸고 귀하신 몸이다.

 

 

 

 

 

우리가 보통 일식집이나 초밥집에서 먹는 고추냉이는

불행하게도 값싼 서양 고추냉이 분말에 초록색 물을 들여 물에 개어 만든 것이다.

사실 톡 쏘는 맛 외에 별 공통점은 없다.

서양 고추냉이가 단순하게 톡 쏘는 맛이라면

신선한 고추냉이의 맛은 크리미하고 향긋하며, 후추 향이 나고 채소 맛에 약간 달착지근한 뒷맛이 남는다.

서양 고추냉이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향을 지니고 맛도 순하다.

 

 

와사비 가루...천연색소 사용이라는 문구가 보이는가?

 

 

3.     매운 맛의 정체를 밝혀라.

 

고추의 매운 맛은 캡사이신이라는 물질 때문이다.

고추냉이는 알릴 이소티오티아시네이트 allyl isothiocyanate라는 성분이 매운 맛을 낸다.  

고추와 후추의 매운 맛의 작용은 60도 이상의 고온에서 유의미한 휘발성을 띤다. 

즉 끓이거나 볶아야 제대로 매운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고추냉이의 매운 맛은 상온, 입 안의 온도에서도 강한 휘발성을 가진다.

시원하게 매운 맛의 비결이다.

향이 콧속으로 강렬하게 침투하며 빠르게 풍미가 입안 곳곳에 퍼진다.

 

그러나 고추냉이 뿌리는 그냥 먹으면 쓴 맛 밖에 나지 않는다.

곱게 갈아서 먹어야 제대로 톡 쏘는 매운 맛을 즐길 수 있다.

고추냉이의 식물 세포가 손상을 입으면 효소가 고추냉이 세포에 안의

이소티아시안산염을 분해하며 자극성 분자들로 풀어놓는다.

이 매운 분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매운 맛을 풀어놓는다.

 

 

 

 

고추냉이가 매운 맛을 내는 매커니즘은 사실 동물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화학적 방어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고추냉이의 매운 맛에 중독된 망할 놈의 인간 때문에 도리어 사랑 받는(?) 신세가 된 것.

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게 목적인 생물의 유전적 전략으로 보면 적당한 희생을 전제로

고추냉이를 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성공적 전략인 셈이다.

 

이소티오티아시네이트라는 이 휘발성 물질은 공기와 접촉하면 쉽게 날아가버린다. 기껏해야 15분을 버틴다. 

그래서 바로 뿌리를 갈아서 잡숴야 고추냉이의 제대로 된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아시다시피 신선한 고추냉이 뿌리를 캐서 보관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나마 매운 맛을 즐기는 방법은 뿌리를 말려 가루로 빻아 보관했다가 먹을 때마다 물에 개어 만들어 먹는다.

우리가 보통 맛보는 고추냉이는 그렇게 만들어진 맛이다.

 

 

4. 고추냉이. 어떻게 잡숴야 맛나나?

 

 

 

 

고추냉이는 보통 횟집이나 초밥 집에 가면 밤톨 모양으로 만들어져 메인 메뉴의 단역급으로 등장한다.

죽어도 주연급은 될 수 없다. 만년 스타의 액션에 리액션을 쳐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연기를 쫌 해보신 분들은 안다.

액션 보다 리액션이 진짜 중요하다는 사실을...

고추냉이는 그런 존재다.

고추냉이와 간장없는 생선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고추냉이와 생선회는 왜 궁합이 맞을까?

먼저 지식검색의 말씀 들어보자.

 

"한방에서는 봄에 땅속줄기의 잔뿌리를 떼어내고 말린 것을 산규근은 (山葵根)이라 해서

류머티즘·신경통 등의 아픈 부위에 바른다.

생선중독·국수중독 치료에도 쓰며 향신료나 방부제·살균제로도 쓴다고 한다."

 

 

다 이해가 되는데 생선중독, 국수중독은 뭔가? 

대충 돼지고기와 새우젓의 관계쯤으로 새겨 듣도록 하자.  

일단 물고기와 고추냉이를 믹스해 자셔보면...

생선의 비린 맛이 한결 줄어들고

밋밋한 생선살의 맛에 액센트를 준다.

단백질의 달달한 식감이 한결 살아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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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에 빠진 고추냉이

 

보통 한국 사람들은 생선회와 고추냉이를 곁들여 먹을 때

그림에서 처럼 간장에 고추냉이 덩어리를 풍덩 빠뜨려 휘휘 저어

간장 고추냉이 소스를 만든 후 거기에 생선 한 점을 푹 절여 자신다.

별로 추천해드리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생선살과 간장, 고추냉이가 범벅이 되어 도무지 무슨 맛인지 구별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고추냉이의 풍미를 느낄 수 없다.

여기에 어떤 분은 초장까지 결합시켜 완전히 색다른 맛의 세계를 창조하신다.

 

 

콩 한알 정도 생선살에 얹어...

 

생선회 쫌 자셔봤다는 분들은 생선살에 콩알 반쪽 만한 고추냉이를 슬쩍 얹어 장은 따로 묻혀 드신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맛이 입 안에서 만나며 맛과 향이 변화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있다.

여기서 주방장과 안면 좀 있으신 분들은 슬쩍 생와사비를 달라는 싸인을 보낸다.

그럼 주방장께서 알아서 SB 505 생 와사비를 챙겨주신다.

 

 

 

 

물론 분말 고추냉이를 물에 갠 것 보다 맛은 훌륭하지만

신선한 고추냉이의 뿌리를 바로 갈아서 먹는 것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최근 한국에서도 고추냉이 뿌리를 즉석에서 갈아 내는 일식집이 있지만

가격이 워낙 만만치 않아 맛보기 쉬운 편은 아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음식 좀한다 하는 식당에서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고추냉이를 뿌리 채 갖다 주신다.

비록 ‘맛맹’이라 할지라도 어찌 신선한 원재료를 즉석에서 갈아 드신다는데 풍미를 느끼지 못할까?

일단 만들어 먹는 자체가 즐겁다.

곱게 곱게 갈아야 맛과 향이 더 풍부하단다.

 

 

 

 

열심히 강판에 문지르는데 자세히 보니 강판이 좀 묘하게 생겼다.

발뒷꿈치 각질 제거용으로 제법 쓸만해 보이는데….주인장, 이 녀석 정체는 뭐요?

 

 

5.     강판…그 디테일의 세계

 

사메카와 오로시 鮫皮おろし~~

 

문자 그대로 옮기자면 상어가죽으로 갈기 정도로 옮길 수 있을까?

한국 같으면 생 고추냉이 뿌리를 갈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에

강판이 프라스틱이나 ‘스뎅’ 도 아니고 무슨 상어 껍질로 만든 강판이란다.

 

 

손잡이 부분에 죠지로 長次郞 作이라는 글자를 눈여겨 봐두자.

 

 

신선한 고추냉이 뿌리는 먹기 몇 분전 강판에 갈면 

20가지 휘발성 물질이 쏟아져 나온다.

톡 쏘는 맛, 양파향, 단 맛 등등

가능한 세포벽을 잘게 부숴야 톡 쏘는 향이 더 풍부해지는데

이 때  상어껍질로 만든 강판으로 문대 주셔야 한다.

 

상어껍질을 직접 보신 분들이 드물어 설명을 하자면

상어 껍데기는 사람의 이齒牙와 같은 에나멜 성분으로 만들어진 앰보싱이 쫙 깔려있다.

이게 제법 견고하고 단단해서 동전을 갈 수 있을 정도라 하는데…

이 상어껍질로 만든 강판으로 고추냉이를 갈아줘야 섬세하고 치밀하게 끈기가 있는 크림 형태가 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양철이나 프라스틱으로 만든 것보다는 훨씬 폼도 나고 있어 보인다.

가는 방식도 일본 글자 ‘노 の' 를 쓰며 갈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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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상어껍질 강판의 역사가 만만찮다.

에도 말기 초밥과 메밀국수가 대중화되며 이런 상어 생가죽을 씌운 강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들었던 디자인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이야기.

지금도 제법 한다 하는 음식점에서는 ‘사메카와 오로시’을 쓴다.

맛이야 둘째치고 에도 시대 때 쓰던 강판을 지금도 쓴다니.

참 별것도 아니지만 한결같은 고집과 자부심이 한편으로 부럽다.

 

일본 라쿠텐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이 상어가죽 강판을 살 수도 있다.

작은 것은 20,000원에서 큰 것은 40,000원 정도...

집에서 고추냉이 갈아먹자고 이런 강판을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http://www.rakuten.co.jp/shokki/481015/475247/ (라쿠텐 사이트)

 

여기서 또 하나…위 그림의 강판을 자세히 살펴 보자. 

죠지로長次郎 作 이라는 글씨가 보이는가?

그저 죠지로라는 사람이 만들었나보군…

이렇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무슨 강판에 예술품도 아니고 만든 사람 이름씩이나 적어 넣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라쿠

 

도예나 다도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 ‘죠지로’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죠지로는 일본 다도의 창시자인 센토리큐 문하에서 수학하며, 라쿠樂燒’라는 다완을 만든 도공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죠지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그런데...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도공이 난데없이 

에도 후기의 고추냉이를 갈아먹는 강판을 만들었다는 건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자세한 사실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사메카와 오로시’는 라쿠야키를 만든 죠지로가 이 강판을 만든 것으로 기록한다.

진실 여부를 떠나 강판 하나에도 ‘사연’ 즉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일본인의 집요함은 참으로 놀랍다.

400년전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 죠지로의 사연이 한 덩어리 고추냉이에 실려있을 줄 누군들 짐작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