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하몽

하피즈 2010. 1. 19. 19:00

 

 하비에르 바르뎀이 하몬으로 살인을 하는 장면

영화 <하몬 하몬> 1992년 비가스 루나

 

삼겹살에 곁들인 소주 한잔, 돼지족발과 짭짜름한 새우젓, 매콤한 아구찜과 미더덕,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쌀밥에 향기로운 간장게장....여행 중 상상을 하고 있다면 식탁위에 거위 간과 송로 버섯, 철갑상어 알이 올라온다 하더라도 모든 이국적 맛에 대한 예찬은 공허한 찬사에 불과해진다. 이가 시릴 정도로 말끔한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이 오로지 간절하다. 상상조차 하지 않는 편이 덜 괴롭다. 가장 고집스럽고 보수적인 입맛은 허기보다는 포만으로 다스리는 것이 적절하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까탈스런 입맛 다스리기인데 스페인은 한국과 무척 먼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많다. 밥과 야채, 숙성음식을 주로 하는 한국 음식과 재료나 조리법 등 모든 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있지만 맛에 대한 코드는 유사한 면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몬hamon이다.

 

스페인의 어느 재래시장에서나 진열대 위에 메주처럼 주렁주렁 매단 하몬을 볼 수 있다.  돼지 뒷다리를 허벅지부터 잘라 훈연한 후 소금에 절여 짧게는 1년에서 2년 반 동안 숙성시킨 바로 하몬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햄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햄 하면 연상하게 되는 둥근 모양의 가공 햄과는 맛과 색, 향과 육질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육포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다.

 

소금과 각종 인공 감미료를 넣어 가공한 햄과는 달리 하몬은 만드는 과정이 자연과 가깝다. 돼지 허벅지의 모양새를 그대로 살린 투박함, 인위적으로 열을 가하지 않고 저온에서 오래 묵은 진득함, 순수한 소금이 단백질과 지방과 뒤섞이며 독특한 냄새, 이 과정들이 오랜 시간에 녹아 하몬의 맛을 결정한다. 동해의 찬바람을 맞으며 겨우내 얼고 녹음을 반복하며 꾸덕꾸덕 말라가는 과메기가 떠오른다. 하몬 중에도 최상급으로 하몬 이베리코는 도토리만 먹힌 흑돼지의 허벅지로 만든다. 잘 숙성시킨 하몬 이베리코는 우리 돈으로 150만원을 호가하니 이것만 하나만으로 스페인인들의 하몬에 대한 사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하몬을 맛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귀해서가 아니라 하몬 이베리코는 고사하고 하몬 세라노와 같은 보통 하몬들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다. 다진 돼지고기와 소금, 빨간 피망을 돼지창자에 채워놓은 초리조, 햄과 돼지비계에 후추열매를 가미해 매콤한 맛을 낸 살치차(살라미와 비슷) 등으로 하몬을 대신한다. 하몬 보다 값은 저렴해도 일반적인 소세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은 탁월하다. 매콤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겐 하몬보다 차라리 초리조나 살치차가 더 친근하다. 와인과 바게트, 치즈 그리고 초리조 몇 조각이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물론 하몬의 맛은 이것들과 전혀 다르다.

 

하몬을 주문하면 주인은 아주 얇게 하몬을 썰어 종이에 담아준다. 잘 숙성시킨 하몬에는 보통 햄에서 느낄 수 없는 특유한 향이 풍기고 얇게 썬 고기의 단면은 지방 마블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반지르르한 기름이 살코기의 표면에 흐르며 선홍빛은 맑은 윤기를 띤다. 속이 비칠 만큼 얇게 썰어 혀끝에 올려놓은 첫 느낌은 촉촉하고 향긋하다. 돼지고기 특유의 비릿내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짭짜름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곧이어 쫄깃한 육질은 마치 생선회를 올려놓은 듯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있다. 열에 익히거나 굽지 않은 돼지고기가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하몬은 여러 가지 조리법이 있지만 익히지 않고 그대로 먹어야 하몬의 제대로 된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주로 얇게 썬 하몬을 그대로 술안주로 먹거나 빵 또는 올리브와 함께 먹는다. 재료의 맛을 살린 순수함과 담백함이 스페인의 요리 정수라면 하몬은 바로 그 중심에 있다.

 

스페인 인들의 하몬에 대한 사랑은 그야말로 광적이다. 하몬을 소개할 때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에르 바르뎀이 출연한 영화 <하몬 하몬>이 빠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하몬은 욕망, 육감적인 풍만함, 여성의 은밀한 그곳으로 상징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살인을 하는 장면에서 흉기 쓰인 것이 바로 하몬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의 탐욕은 상징하는 선홍빛 하몬... 하몬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하몬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