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 마차푸차레Machapuchare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며 두 번 놀랬다. 그 첫 번째는 짐을 운반하는 포터들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선택하든 아니면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선택하던 제일 처음 결정해야 될 것은 포터를 쓸 것인가? 에 대한 문제다. 대체적으로 트레커가 연로하거나 인원과 장비가 많은 경우 포터를 고용한다. 홀몸에 짐이 단출한 경우 따로 포터를 쓰지 않아도 큰 어려움은 없다.
워낙 길도 쉽고 마을은 서너 시간마다 나온다.(ABC트레킹의 경우)
마을에는 식당을 겸한 롯지Lodge가 있어 굳이 힘들여 식량이나 야영도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롯지와 민가에 음식과 연료, 그리고 갖가지 생필품을 조달하는 건 이 지역에 사는 포터들이다.
그들은 매일 하루에 8~10달러 내외의 돈을 받으며 30kg이 넘는 짐을 지고 5,000미터에 가까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제 집 드나들 듯 오간다.
질 좋은 등산화나 좋은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맨발에 슬리퍼 그리고 지팡이, 짐을 실을 수 있는 망태기 같은 바구니 하나면 충분하다.
남녀는 물론 나이도 10대 후반에서 노인까지 걸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일 정도다.
네팔인 포터들은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하루 종일 히말라야 산길을 오르내린다.
그들을 보면 고작 10kg 남짓한 배낭을 지고
방수와 땀 흡수가 뛰어난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헉헉대는 자신을 볼 때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뭐 그리 대단치도 않은 산행을 그렇게 수선을 떨고 요란스럽게 가는지 ...
그리고 포터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조금 궁금했다.
직접 포터를 고용하지 않더라도 마을의 롯지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사먹는다면
간접적으로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과 결과는 같다.
아무리 뛰어난 등반가라고 해도 히말라야에서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같은 전설적인 알피니스트를 제외하고...
(라인홀트 메스너는 포터의 도움없이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8,000미터 14좌를 완등했다.)
나귀로 짐을 실어나르는...
최근 모 한국 여성 산악인의 8,000미터급 고봉 14좌 완등에 관한 논란이 불거졌다.
마치 그 산악인 정상등정의 진실 여부가 쟁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산악인들의 피크 헌터peak hunter식 등정 방식이다.
산소통을 짊어지고 가던 포터가 나귀처럼 모든 짐을 가던 베이스캠프까지 헬리콥터로 가던
정상만 정복하면 된다는 성공 지상주의와 천박한 명예욕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한국은 8,000미터급 14좌를 모두 등정한 사람들은 무려 넷이나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산악 강국이라고 으시댄다. 과연 그럴까?
그들 중 산소 마스크를 의지하지 않거나 셀파의 도움없이 혼자 산을 오르거나
새로운 루트를 찾아 등정한 사람들이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
정상을 찍었다! 그리고 스폰서 깃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하산하는 등반가들과
여행사에서 마련해 준 교통편과 식사를 제공받으며 오로지 여행사 깃발만을 바라보고
프랑스 파리와 영국 빅맨을 찍는 패키지 여행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정상찍기Peak Hunt만 가치있고 어떻게 올랐는지 묻지말라! 인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 정상은 한국의 대청봉처럼 한국 등반인들로 득실댄다는 비아냥대는 소리도 들린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결과만 중요하다는 한국사회의 성공 지상주의가 낳은 비극이 히말라야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포터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셰르파Sherpa’란 단어가 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산 남쪽 기슭의 소로 쿰푸 지방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계 네팔인들을 일컬는다.
서구인들이 히말라야로 대거 등반원정을 오며 고산 지대에서도 강인한 체력을 유지하는
셰르파 족을 짐꾼으로 쓴 후로 이제는 히말라야의 짐꾼 같은 의미의 보통 명사처럼 변했다.
그 당시 이들의 일당은 하루 1루피 25원에 불과했다. 노새보다 값싼 것이 사람의 노동력이었다.
이들 셰르파 중 전설적인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의 이름은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다.
그는 1953년 5월 29일 초모랑마-에베레스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세계 최고봉-을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그는 영국 등반대의 짐꾼의 일원이었다.
1차 정상 등정에 실패한 영국 원정대에서 그 당시 뉴질랜드에서 온 에드몬드 힐러리와 함께
텐징 오르가이를 정상에 올려 보냈고 그는 초모랑마 등정에 성공한다.
초모랑마 최초 등정은 영국의 힐러리라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동시에 성공한 것이다.
산을 내려 온 두사람은 끊임없이 한가지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누가 먼저 정상에 발을 올려 놓았는다?"
두 사람은 한결같이 "함께 올랐다"고 말했다.
늘 1등과 2등 첫째와 꼴찌를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산 아래 사람들이
그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힐러리는 늘 이렇게 애기했다.
" 누가 정상에 먼저 올랐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다.
내가 말 할 수 있는것은 남봉에서 정상까지는 내가 이끌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영웅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톈징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뒤에 처진 힐러리를 30분이나 기다렸다.
" 우리는 같은 줄에 묶고 함께 꾸준히 전진했고 힐러리가 처음 정상에 오른 다음 내가 올랐다"
1986년 텐징 노르가이가 숨진 뒤에야 힐러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몇 발자국 먼저 올랐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도 아니었고 ‘최초’, ‘최단’ 같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자연과 삶의 일부였을 뿐이다.
에드몬드 힐러리
텐징 오르가이와 힐러리, 두 사람은 등정이 후에도 지속적인 우정을 유지했다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른 이들의 짐을 짊어진 포터들과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카투만두에서 대학을 다니며 방학 때는 안나푸르나에서 가이드 겸 포터를 하는 젊은 친구는
마오이스트인데다 영어도 아주 능숙했다.
그는 쉴 때면 언제나 책을 꺼내 읽을 정도로 엄청난 독서광이기 했다.
한번은 그가 짊어져야 하는 여행자 짐 외에 자신이 들고 왔던 작은 가방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밥이나 옷대신 제법 묵직해보이는 책이 3권이나 들어있었다.
마차푸차레 6993m
안나푸르나에 와서 두 번째로 놀란 마차푸차레...
그 산을 처음 알게 해준 것은 역시 그 였다.
안나푸르나 지도 한 장에 가이드북 몇 장 북 찢어 준비한 트레킹이었기에
안나푸르나가 1봉에서 4봉까지 있다는 사실도
주변에 다올라기리 라던가 마차푸차레 같은 거대한 산들이 있다는 사실도 물론 전혀 몰랐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 둘째 날 새벽 푼힐Poon Hill에 오른 후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해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미 하늘은 대낮처럼 파랬다.
구름 한 점 없는 동쪽 사면으로부터 빛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른 곳에 검은 두 봉우리를 우뚝 세운 채 서있던 산이 바로 마차푸차레였다.
안나푸르나나 다올라기리 같은 히말라야 14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지 엄청난 마성을 드러내던 그 산 강파른 근육질과 매서운 눈매를 가진 신성神聖에 그만 넋이 나간 것이다.
숨이 막힐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저 산 이름이 뭡니까?
마차푸차레...
마차푸차레 뒤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
물고기 꼬리(Fish's Tail)라는 뜻을 가진 산.
길에서 만난 젊은 포터가 말해주었지만 그 후로도 쉽게 외워지지 않았던 그 산 이름.
그 때문에 몇 번인가 몇 번이나 구박을 받기도 했다.
네팔 인에게 신과 동격인 그 산의 이름을 잘못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격모독이고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기 때문에 유독 잘못 말할 때 마다
그 젊은 포터는 몇 번이고 정확한 산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마차푸차레는 ABC까지 가는 동안 내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 독차지했다. 그 날카로운 선과 신성한 기운은 내내 사람들의 기를 압도했다.
마차푸차레는 히말라야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신성의 산이다.
오로지 단, 한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1957년 네팔 정부로부터 마차푸차레 등반 허가가 났다.
전 세계 산악인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그 해 마차푸차레 원정길에 나선 행운아는
영국 등반가 윌프리드 노이스Wilfrid Noyce(1917~1962)라는 이였다.
그는 마차푸차레에 올랐던 감동을 1년 뒤 <마차푸차레 등반기>(Climbing the Fish's Tail, 1958)라는
책으로 썼다. 윌프리드 노이스는 정상을 바로 30미터 남짓 앞두고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두 서너 시간 후면 정상을 밟을 수 있다고 낙관하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폭설이 쏟아져 내렸다.
마차푸차레의 여신은 그녀의 정상에 인간의 발길이 닿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듯 했다.”
그것이 끝이다. 그때가 인간이 마차푸차레의 정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고,
그 이후에는 누구도 다가갈 수조차 없는 산으로 남았다.
윌프리드 노이스는 마차푸차레 정상 등정에 실패했다.
이 후 네팔 정부는 그 누구에게도 등정허가서를 내주지 않았다.
네팔인들은 국경 분쟁과 내정간섭 등으로 사이가 좋지않는 인도인들에게
“(너희는 없지만) 우리에겐 마차푸차레가 있다”고 말한다.
마차푸차레는 신의 영역인 동시에 네팔인의 자존심이다.
저 산은 누구도 오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세상 어딘가에 인간이 오르지 못할 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차푸차레다 라고...
마차푸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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