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묵은 사진이긴 한데 지난 사진을 여러번 들여다보면
사진을 찍을 때의 느낌이 다시 살아납니다.
여행 사진이란 모델을 정해놓고 찍는 사진보다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셔터를 누를 때가 많지요.
뭘 만들겠다고 표현할 수는 없고 그저 이거다 싶어 먼저 셔터를 누릅니다.
쉽게 말해 '스냅'사진인 셈이죠.
사진기를 처음 손에 쥐고 여행을 떠났을 때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어떤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아니 관심이 좀 없었다고 할까요?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뭐 그런 정도?
그런데 인도에 와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풍경도 그렇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사는 모습이 많이 달랐습니다.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인력거에 매달린 저 소년은 꼴까따에서 '릭샤'를 끄는 남자의 아이입니다.
릭샤꾼은 잠시 그늘에서 쉬고 그의 아이 둘이 릭샤에서 장난을 치고 있지요.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신분 제도가 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물론 근대 국가 설립 이후 법적으로 카스트제도는 폐지되었지요.
그러나 인도에 카스트 제도은 엄연하게 남아있고 그 위력도 매우 셉니다.
인도에서 카스트란 '양반, 평민, 천민...' 이런 사회적 신분제라기 보다
일종의 직업 세습 제도입니다.
미장이나 목수, 제화공 이런 직업이 세습되고 자연스럽게 신분도 따라가지요.
그러니까 저 릭샤에 메달린 아이의 미래는 아버지를 이어 먼 훗날 저 릭샤를
끌어야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인도는 아니지만 느낌이 비슷한 사진이 한장 더 있습니다.
베트남 북부 사파라는 마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파는 작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마을입니다.
고산 지대이기 때문에 기후도 좋고 무엇보다
그 지역에 사는 다양한 소수 부족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이 방문합니다.
이들 소수 부족들은 중국, 미얀마, 베트남은 서로 국경이 맞물린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국경이 나뉘기 오래 전부터 이 곳에 터전을 잡은 것입니다.
이들 소수 민족은 중국인도 베트남인들도 아닙니다.
다만 임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에 따라 이들 이들의 국적은
중국 또는 베트남으로 정해졌습니다.
아이를 업고 달리는 저 소녀도 이 고산 지대 여기저기에 흩어진
마을에 사는 블랙몽족입니다.
예전 블랙몽족의 아이들은 빠르면 13세에 결혼해 15살이면 아이 엄마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혼 풍습이 있었지만 개방 이후 요즘은 많이 늦춰졌다고 하네요.
이 소녀가 업고 있는 아이는 동생일 겁니다.
어쨌거나 이 아이도 주어진 운명에 따른 삶을 받아 들여야겠지요.
운이 좋아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해도
이 소녀가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수심에 찬 얼굴이었습니다.
시간은 아주 더디고 미래는 어두운 얼굴로
찾아올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나는 몰라 하지만 아는 있는 사람은 알지.
그게 누구죠?
바로 너야.
지금의 네가 아니라 아주 오랜 후의 너.
하지만 너는 아주 오랜 후, 오늘을 기억해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또 다시 묻겠지.
우리는 어디로 떠나는지...
또 다른 소녀의 사진입니다.
인도 꼴까따 거리에서 우연히 포착한 장면이지요.
스쿨 버스에 타고 있는 소녀는 뭔가 깊은 상념에 잠겨있습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낯선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요.
때로 이렇게 피사체 몰래 사진을 찍다보면 정말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사진은 일방적 폭력과 닮았습니다.
시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사진의 대상은 무차별적으로
시선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 당합니다.
사진가는 대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심하면 왜곡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찍힌 사진은 그 곳에 담긴 피사체에 대한 편견을 퍼뜨리지요.
사진을 찍기에 앞서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이 먼저 필요한 이유입니다.
허락을 받고 셔터를 누르는 게 원칙이지만 순간적인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을 떄
먼저 사진을 찍고 사후에 사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열 중 아홉은 웃으며 이해하지만 불쾌한 표정으로
사진을 삭제하라고 요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히 유럽 등 서구 국가에서 허락받지 않고
사진을 함부로 찍는 것은 엄연한 사생활 침해입니다.
(단 공인으로 인정받는 경우 예외입니다만...)
좀 미안하고 예의없는 짓이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더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크고
그렇게 나온 결과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에 빠지거나
심한 경우 죄책감에 자살한 사진가들도 있지요.
주로 저널리즘 사진 쪽의 이야기입니다.
여행자의 사진이야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예의있는 사진을 원한다면 사진을 찍기 전 피사체의 눈빛을 마주하고
단 몇 초라도 마음을 나누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사진은 다소 행복한 예에 속합니다.
몰래 찍은 것도 아니고 소년이 카메라를 보고 기꺼이 촬영에 응해주었지요
소년에게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꽃에 포커스를 맞춘 사진입니다.
역광이라 소년의 윤곽만 보이는 군요.
이렇게 사진 촬영을 기꺼이 도와주었지만 유감스럽게 얼굴조차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수행자 고타마는 강가에 서 있는 활짝 핀 사라나무 사이에서
온 종일 지내다가 저물녘 꽃이 가지에서 떨어질 무렵
몸을 일으킨 사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붓다가야의 한 도량으로 나아가
보리수 밑에 이르렀다.
고타마는 보리수나무 아래 풀을 깔고 동쪽으로 향해 앉았다.
수행자 고타마는 스스로 맹세하였다.
“설령 살갗과 근육과 뼈가 닳아지고
몸의 피와 살이 말라 없어진다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나는 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이다.”
“내 사지는 마치 카라풀 같이 말랐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고, 내 척추는 마치 자리틀에 고드랫돌 같이
들고 나고 하였으며, 내 갈빗대는 오래 묵은 집 서까래 부러진 것 같았다.”
고타마 싯타르다는 극도로 수척해진 몸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탁발을 위한 발길이 닿은 곳은 우르벨라 세나니 촌이었다.
앞선 사진과 같이 이 장면 역시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어느 먼 곳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이 곳까지 순례를 떠난 스님이시겠지요.
주황색 가사가 너무나 선명합니다.
경내에는 4000년 전 보리수의 손자, 손자의 손자 뻘쯤 되는 보리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고타마 싯타르다는 극도로 수척해진 몸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탁발을 위한 발길이 닿은 곳은 우르벨라 세나니 촌이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아이들에게 고타마가 물었다
“이곳이 수자타 마을인가?”
2,500년 전 섣달 초여드레 아침,
마을 처녀 수자타가 여덟 마리의 암소를 짜서 끓인 우유죽을
발우에 담아 고타마에게 올렸다.
“성자시여, 제 소원이 이루어졌듯이 당신의 소원도 이루어지소서.
마하보디 사원을 나와 남쪽으로 30분 쯤 걸으면 제법 큰 강이 보입니다.
건기였던지라 강물이 비쩍 말라있더군요.
그 강을 건너면 일명 수자타 마을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스무날이 넘도록 고행하던 부처에게 죽을 준 이가 바로 수자타입니다.
수자타는 이 마을 촌장의 딸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이 수자타 마을의 우물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우물 속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시선과 마주칩니다.
도대체 나와저 아이는 어떤 운명을 공유하기에
서로 눈빛을 마주하게 된 걸까요?
그토록 영원한 시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섭씨 43도, 습도 99%를 웃도는 더위에 지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이 부족해 병든 닭처럼 낮에는 꾸벅꾸벅 좁니다.
반나절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마을에서 3일을 더 버텨야 합니다.
바라나시Varanasi로 가는 기차는 일주일에 단 두번...
그것도 이 곳 부다가야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가야Gaya로 가야 탈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단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헉헉댔지만
저 가족은 이곳에서 30년을 아니 3대를 더 버티며 살 것입니다.
인도에서 만난 사람 중 처음으로 방-도미토리-을 함께 쓰고 이름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모니카 로페즈, 멕시칸계 미국인입니다.
나이는 21살. 인도에 오기전까지 무엇을 했냐고 물었더니
'메카닉'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메카닉??? (혹시 무슨 건담 같은 로봇 만드는 일?)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그녀의 직업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기술 계통 이겠지 했는데 메카닉이란 자동차 정비소라더군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1살 처녀가 자동차 정비사라니...
그녀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사 뿐 아닙니다.
바텐더이기도 하고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인도에서는 수학 선생이라는 타이틀이 또 하나 붙었습니다.
모니카는 인도에 오기 전 고등학교 때부터 인도 여행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졸업 후 일을 하며 3년 동안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인도 여행을 떠났으며
3개월 동안 아주 작은 벽지에서 인도 아이들에게 수학-셈하는 법-을 가르친 후
나머지 여행 한 달을 자신을 위해 쓴다고 합니다.
거기다 그 무거운 기타 통을 들고 왔더군요.
아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나요?
성적을 위한 봉사 점수를 따기 위해 억지 봉사 활동을 해야하는
한국 아이들이 가여웠습니다.
모니카와 함께 바라나시를 왔습니다.
죽기 전에 바라나시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 삶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작은 배에 시신을 싣고 강가-갠지즈-로 노를 저어갑니다.
인도인에게 강가는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에 누릴 수 있는 시바의 축복입니다.
이 강물에 몸을 적셔야 카르마-Karma業-의 영원한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시신을 꽃으로 장식한 후 강가에 몸을 깨끗이 씻겨 불사릅니다.
연기와 함께 육신이 사그라들면 남은 재를 강물에 뿌립니다.
그렇게 이승과의 인연을 마칩니다.
인도사람들은 화장터인 이 곳을 가트라 부릅니다.
바라나시의 강가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50군데가 넘는 가트가 있습니다.
강가에서의 죽음을 최고의 축복으로 알기에
죽음을 앞 둔 인도인들은 먼 길을 마다치 않습니다.
바라나시는 지구에서 가장 거대하고 오래 된
삶과 죽음의 경계입니다.
몇 천년을 그렇게 이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밤의 강은 육신이 소멸한 영혼들로 가득합니다.
그 강에 안개에 젖은 달빛이 내렸습니다.
배를 저어 처음 출발했던 가트로 돌아갑니다.
낮의 열기는 밤이 찾아와도 누그러들 줄 모릅니다.
죽은 자들만 바라나시를 찾는 건 아닙니다.
바라나시에는 인도 전역에서 찾아온 사두들로 늘 북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보통 사람보다 사두들이 더 많은 것도 같습니다.
어떤 사두들은 행려같기도 하지만 그 까짓 세속적 구분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그들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태어났던 그 곳을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때로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
자전거 릭샤입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도덕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차마 사람이 끄는 릭샤를 탈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르 흐를 지경인데
릭샤를 편안히 앉아있으면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아서 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릭샤를 끄는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
단지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던 것 뿐 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괜히 인도 여인들은 지혜로울 것 같다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무슨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학위를 따서 얻을 수 있는 그런 지식과는
성격이 다른 그런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구요?
그들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드디어 네팔을 향해 떠납니다.
지긋지긋한 더위도 이틀만 참으면 당분간 피할 수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 분의 직업도 저전거 릭샤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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