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리지앙에서 온 편지

하피즈 2009. 2. 24. 18:35

 

지앙에서 온 편지

 

...잘 지내세요? 여기 리장의 겨울은 너무나 눈이 부실정도로 태양이 가득하네요.

리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  남지우

 

 

 

S# 1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살구꽃이 한창이던 어느 봄날 리지앙에서 였다. 오색석이 반짝이는 리지앙 고성의 밤거리를 배회하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낯익은 글자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어 강습> 중국어 안내문과 전화번호 하나...<Water Lymph>라는 작은 카페 유리문에 작은 전단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나직한 노래가 걸음을 돌려세웠다. 아마 윤도현의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터님프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지우씨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네 다섯 명의 손님 앞, 반 평 남짓한 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랑했나봐>를 열정적으로 부르던 사내.

내가 기억하는 그의 첫 모습이다.

해병대 스타일로 짧게 쳐올린 머리 스타일... 첫 인상이 썩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색석이 빛나던 리지앙 밤거리

S# 2

그의 공연은 11시에 끝났다. 우리는 함께 샹그릴라 와인과 따리 맥주를 마셨고 카페 영업이 끝난 뒤에는

티베트 친구가 주인인 작고 허름한 바에서 또 맥주병을 비웠다

그는 한국인이다. 한 때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살았고 3년 전 중국 리지앙으로 여행을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내가 본 그의 삶의 일부다.

그는 낯선 항구의 불빛을 좋아하는 외항선원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삶에 만족하지만 그림자는 조금은 외로운...

그렇게 우리는 몇 일간 술을 마셨고 티베트 국경이 열리지 않자 베트남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국경도시 허코우로 떠났다.

 

 

해질 무렵 처마

 

S# 3

리지앙에 다시 돌아온 건 같은 해 가을이었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비해 리지앙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루앙프라방에서 이틀간 버스로 달려 중국 국경을 넘었고

새벽에 쿤밍에 도착하자 바로 리지앙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오로지 차마고도를 넘어 티베트 라싸, 그리고 카일라스에 가려는 욕심에 리지앙 행을 서둘렀던 것이다.

봄에 묵었던 리지앙 고성 호스텔에 짐을 풀고 저녁 무렵 <Water Lymph>에 찾아갔다.

과연 그가 지금까지 있을까?

약간의 희망과 불안함을 안고...

그러나 그는 그곳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늘 그랬던 것처럼 낯선 항구로 떠났으리라... 

그렇게 체념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 잠베이로 리듬을 맞추어 주던 중국인 친구였다.

그는 아직 리지앙을 떠나지 않았고 다른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바를 찾아갔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보컬과 베이시스트, 드럼이 가세한 'freshNam Band'...

여름 동안 그가 리지앙에서 만든 4인조 밴드의 이름이다.

 

 

 

 

S# 4

봄에 그랫던 것 처럼 또 밤이 깊도록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친구들까지 가세해 술자리를 점점 커졌다.

리지앙에 장기 거주하던 여행자들은 매일 저녁 바에 모여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티베트로 가는 길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리지앙의 푸른 밤을 술로 흘려 보내던 가을,

중국에는 일주일 간의 황금연휴가 시작되었다.

휴양지의 호텔은 이미 몇 달전부터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그나마도 2,3배의 요금을 지불해야 가능했다.

리지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머물던 호스텔에서 나와 그가 세들어 살고 있는 미국인 친구 토니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뉴욕에서 온 토니는 중국인 아내 메이와 함께 리지앙에 살며 연극과 공연,

각종 문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는 다재다능한 남자였다.

물론 토니 또한 'freshNam Band'에 멤버 중 한명으로 그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S# 5

토니의 집에는 토니 부부와 그 외에도 여러 명이 함께 살았다.

나시족 처녀와 중국 대학생 둘, 그리고 모녀.. 모두 음식을 함께 해먹고 요가를 하고 토니에게 영어를 배웠다.

시간이 나면 낚시를 가고 김치를 담그고 그가 연주하는 크고 작은 공연에 놀러가 박수를 쳐주고

한국 요리를 만들어 주며 리지앙의 나날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토니의 아내인 메이를 통해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리지앙 시내의 여자 교도소에서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금전적인 댓가가 따르는 공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토니는 흔쾌히 공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부를만한 노래를 몇 곡을 준비하고 멤버들은 일주일을 넘게 연습했다.

 

 

 리지앙 교도소의 공연이 시작되고...

 

S# 6

처음에 조금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

아무리 여자 교도소라고 하지만 특성상 경직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 중 한 명은 한국인,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인...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소위 중국인들이 따라 부를만한 대중가요도 아니다.

프레쉬남 밴드가 준비한 레퍼토리는 올드 팝 계열의 락 앤 롤, 7~8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대중가요 3곡,

그리고 중국노래 둘...

중국노래를 부르기엔 토니와 그의 중국어는 무척 서툴렀다.

 

 

노래를 부르는 뉴욕커 토니

 

 

 가운데 남지우, 오른쪽 베이스 빅터, 드럼 하오하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남지우

 

 

S# 7

박수치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재소자들의 얼굴에 조금씩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비록 귀에 익은 중국노래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밴드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 중간에 토니가 농담을 하면 아내인 메이가 통역을 해준다. 웃음이 한결 가볍고 밝아졌다.

그가 노래를 부를 차례였다. 처음에는 고래사냥... 중국여인들에게 조금은 낯설다.

그리고 이어진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곡 오나라...

 

 

 

함께 노래를 부른 토니

 

 

 

토니가 그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노래 부르기를 청하자 몇 마디씩 노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푸른 가을 햇살처럼 철장의 앞마당을 환하게 물들였다.

2시간에 걸친 공연은 어느새 마지막 곡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지막 노래는 통역을 맡은 토니의 아내 메이의 차례.

그녀가 부른 노래는 아마 등려군의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 <첨밀밀>의 주제가로 쓰였던...

 

 

 노래를 부르다 목이 매이고... 

 

사람들은 모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메이와 함께 한소절 한소절 노래를 따라 불렀다.

 

 토니와 메이의 문에도 눈물이 고이고...

 

메이의 눈에도

푸른 수의를 입은 여자들의 눈에도 슬프지만 따뜻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수감자들도 아픈 가슴을 훔쳤다.

 

 

 

이 순간 만큼은 갇힌 자도 없었고 이방인도 없었다.

그저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만 있었을 뿐...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 

공연이 모두 마무리 된 후에도 프레쉬남 밴드는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리지앙 여자교도소 앞.... 공연을 끝낸 후 촬영한 사진

 

나는 이 겨울이 가기 전 리지앙에 답장을 보낼 것이다.

언젠가 리지앙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공연 후 기념으로 만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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