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노예무역의 시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치욕의 시기에 아프리카인들은 가장 용감하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힘을 보여준다. 아프리카는 고통조차도 찬란한 빛으로 바꾸는 힘을 가졌다....
- <아프리카의 역사> 존 아일리뜨
고레섬에 사는 소년
'1441년 포르투갈인 선장 안탐 곤살베스는 그의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흑인 남녀 한명씩을 납치했다.'
역사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 후 400여년 동안 약1,300만 명의 흑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아메리카로 강제로 팔려갔다. 이 비극의 역사는 세네갈 다카르 서쪽 해안의 작은 섬 고레Geree에서
시작되었다.
고레섬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배가 출발한지 불과 20여 분. 작고 아담한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섬의 이름은 고레Goree.
고레섬으로 가는 사람들 중 반은 백인 관광객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럼 없이 세네갈인들과 섞여 농담도 주고 받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고레섬으로 향했다. 이들의 얼굴에서 불과 100년전 사람을 사고 팔았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고래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고레섬은 생각보다 작고 고요했다.
선착장에서 바로 앞마당에 아프리카의 상징인 바오밥 나무가 우뚝 서있고 그 뒤로
프랑스 식민시대 때 만들어진 적갈색 건물들이 뜨거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쇠락해간다.
천천히 걸어도 섬은 두 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다.
고레섬 광장의 바오밥나무
만약 바오밥 동호회가 있다면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에게 감사패라도 헌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한 그루도 보기 힘들지만 이 나무의 이름은 소나무 만큼이나 친숙하다.
모두 <어린왕자>의 덕이다.
아프리카의 상징인 이 나무는 세네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마을 터를 잡고 가장 먼저 바오밥 씨앗을 뿌린다.
바오밥은 오천년을 산다고 알려진 나무다.
겨울-섭씨 30도가 넘지만 겨울은 겨울이다-에 잎과 씨앗을 땅에 모두 떨구고 옹이진 가지를 하늘을 향해 뻗는다.
땅에 거꾸로 처박아 뿌리가 하늘로 솟은 형상이다.
아프리카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녀의 저주에 의해 뿌리가 땅으로 솟고
가지가 땅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나무다.
바오밥 나무의 껍질과 뿌리는 약으로 쓰인다.
바오밥나무
레스토랑과 기념품 상점들이 골목에 나란히 들어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란한 원색을 사용한 아프리카 풍의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이 섬 중앙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언덕을 올라서면 1차 대전 당시 대서양 길목을 지키는 거대한 포대가 녹이 슨 채 버려져 있다.
현재 포대는 이 섬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의 아뜨리에로 변했다.
녹슨 포대
고레섬 언덕에서 바라본 대서양
선착장을 기준으로 섬 오른편으로 돌면 무슬림 사원과 해안 절벽 -영화 <빠삐용>의 라스트 신이 촬영된 곳이라고
알려졌지만 노예와 관련된 역사를 좀 더 흥미롭게 포장하기 위해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이 보이고 해안선을 따라
섬 왼편으로 돌아가면 이 섬을 찾는 첫번째 이유인 노예의 집과 만날 수 있다.
노예의 집은 과거 이곳을 점령했던 포르르투갈, 프랑스, 영국 노예 상인들이 유럽과 아메리카로 노예를 보내던 장소다.
이곳은 19세기 말 네덜란드 노예상인이 소유하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예의 집 앞 동상
노예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남녀 흑인 두명이 사슬을 끊고 서로 부둥케 안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그 조각상 옆의
비문에는 고레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단지 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영원한 (자유의) 정신입니다."
노예의 섬 안을 들어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양 갈래 계단이 보인다.
1층은 노예를 수용하는 공간이고 2층은 노예상인들의 거처였다.
빛도 제대로 들지않느 1층 내부는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를 수용하는 시설로 나뉘어져있고
계단 아래는 비좁은 징벌방도 보인다.
아프리카 각지에서 납치해온 사람들은 다른 대륙으로 팔려가기 전까지 이곳에 갖혀 길게는 보름에서
한달씩 기다렸다. 서너평 남짓한 방안에서 100명에서 많게는 200여명까지 수용했던 이 방은 화장실이
따로 없어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용변을 해결했고 물론 웅크리고 잠들 수 있는 공간마저 없어
서있는 채로 잠들어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예들이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다.
고레섬 앞바다
죽은 노예들은 고레섬 앞바다에 버려졌는데 그래서 예전에 고레섬 주변에는 상어들이 항상 떼를 지어 몰려 다녔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거친 파도와 상어떼로 둘러쌓인 고레섬. 이 섬을 빠져나갈 방법은 단 두가지 뿐이다.
죽어서 상어밥이 되던가 아니면 노예선에 실려 팔려 가던가 둘 중 하나다.
이 섬을 나간다고 해도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메리카로 가는 배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들으 손발에 쇠족쇄가 묶인채 1인당 0.4입방미터의 공간이 주어졌으며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항해기간 동안 배멀미와 불결한 환경, 영양부족 등으로 인해 평균 절반 정도의 노예들이 숨져
바다에 버려졌다.
고레섬 주민들
노예의 역사는 물론 아프리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한국도 조선시대까지 엄연히 노예제도가 있었고
과거 그리스나 로마문명이 꽃을 피웠던 고대 시대에도 노예 제도는 인간 역사의 일부분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들 노예는 전쟁에서 진 나라의 국민이나 민족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아프리카처럼 단지 몇 푼의 돈을 위해 인간을 전문적으로 사냥하고 짐승처럼 취급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고작 장신구 몇 개와 총 따위와 맞바꿈 당해 아메리카로 팔려간 아프리카 노예들은 대규모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평화와 사랑을 염원하는 고레섬의 벽화
유럽의 부는 무력을 침략한 아메리카 식민지와 아프리칸의 노동력을 착취해 축적한 피의 탑인 셈이다.
노예 무역을 통해 남미와 북미로 팔려온 선조들의 아프리칸계 후예들은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비인간적인 삶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레섬 노예의 집이 더욱 비극적인 까닭은 이같은 불의의 역사에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고레섬 앞바다는 절망의 벼랑끝에서 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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