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열번째 이야기> '똥포'의 힘

하피즈 2010. 3. 31. 14:51

 

 

순례자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면 하오에 목적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하루 평균 25km를 걷는다. 힘은 남았으나 무릎이 저리고 발이 부르튼다. 점심 끼니를 떼우고 한 시간 정도 햇볕에 부은 발을 말리면 곧 발바닥에 뭉쳤던 부기는 사라진다.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다음 날 걷기 위해 힘을 아껴둔다.

 

 

도마뱀 한마리가 ....

 

 

군장을 갖춘 군인의 행군 거리가 하루 평균 20~30Km, 좀 더 무리를 하면 40~50Km까지 갈수 있다. 평균적 체력을 가진 남성이 걸을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다. 경험이 많은 등반가들의 경우 약 20Kg내외의 배낭을 짊어지고 10~15Km 내외의 산길을 걸을 수 있다. 까미노는 그다지 어려운 길이 아니다.  주변에 볼 것과 쉴 장소들이 많아 길고 지루한 산책로 정도로 보면 된다. 

 

 

새벽에 길을 떠나는 순례자들

 

 

그럼에도 일주일 이상을 쉬지 않고 걷다보면 꾀도 나고 짐도 버겁다. 노트북에 사진 장비까지 들어간 배낭이 특히 쎄가 빠지게 무거웠다. 사진 욕심에 늘 한손에 육중한 사진기를 들고 있기에 남들처럼 지팡이에 의지할 수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왜 이런 미친 짓을 사서해야 하나 후회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요런 나약한 악마의 속삭임에 엉뚱한 기억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말하기 좀 민망한 군대 시절 이야기다. 현재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방위, 정식 명칭은 단기 사병이라는 복무 제도가 있었다. 동네의 아이들도 방위가 가면 돌을 던지며 '방위새끼' 간다고 개무시를 했다. 조금 격이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병역특례요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특'자와 '요원'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전문성과 특수함은 '방위'들에게서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을 만큼 한심하고 찌질했다.

군인이란 이름을 어찌 감히 내세우지도 못하는 방위는 입대가 아니라 소집이었고 제대가 아니라 소집 해제였다. 일년 반 소집 기간 동안 출퇴근하며 동사무소에서 예비군 통지서 돌리기가 방위의 본분임을 알았으나 1개월 기초군사 훈련 후 군대는 나에게 예비군 통지서도 민방위 소집 통지도 아닌 20.5Kg 짜리 고철덩어리를 내밀었다.   

연식도 찬란한 1951년.... 6.25 때 참전하셨을 어르신... 60미리 박격포다. 전쟁 박물관에서나 모셔야 할아버지 세대의 역사적 유적이 왜 튀어나왔나? 당최 이게 웬 말인가? 아버지이! 어디로 가시나이까? 

당시 힘깨나 쓰고 빽 좀 있다는 자제 분들이 정체 모호한 방위병 본연의 직분을 수행하는 나라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으나 역시 밑천 없이 저자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천출賤出들은 언감생심 그런 나라의 은총과 거리가 멀었다. 은총을 못준다면 차라리 소총이라도 다오... -.-;;;; 

배운 것 짧고 진짜 힘깨나 쓰는 애들이 차출되는 화기소대 박격포 분대에 배치된다. 저주받은 방위부대 박격포대원들은 구조도 참 단순한 이 쇳덩어리를 ‘똥포’라 불렀다. (아 김명민이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똥떵어리'가 되었을텐데....) 

이틀 동안 똥포를 양쪽 어깨에 번갈아가며 매고 무려 100km도 걷기도 하고 야간 행군이랍시고 해진 후부터 다시 새벽이 올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천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뒤집어까며 밤을 횡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난다면 어깨를 으깰 듯 짓누르던 박격포에서 설마 포탄이 나가리라고 배운 것 없고 힘만 좋았던 단순무지 박격포대원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차라리 폭탄을 들고 던져라 아니면  백병전에서 그 무식한 쇳덩어리를 휘두르던지....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내가 ‘방위’라는 사실을 소위 ‘쪽’팔려 드러내놓고 말도 못 꺼낸다. 편하게 예비군과 민방위 아저씨들을 불러모으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억울했고 애지중지 기름치며 피똥을 싸며 들고 다녔던 똥포 얘기는 또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지스 함 시대에 무슨 개소리냐?라며 시대착오적 인물로 취급받는다.  나는 언제나 '똥방위'였을 뿐이다. 

 

             (자료사진 : 6.25 전쟁 때 활약하던 60mm 박격포....지금도 버젓히 현장에 배치되어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대한민국의 국토와 국민을 굳건히 수호하고 있다.)

  

 

여명이 필 똥 말 똥

 

 

산티아고를 향해 걸으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 정도 고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똥포’의 추억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지나칠 시간들도 빛나게 해 준다. 아무리 하찮은 순간이라도 ‘똥포의 시간'들에 비하면 몇 배는 더 아름답고 고귀하다. 세상에서 가장 하잘 것 없는 것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하물며 어쨌거나 성지순례인데...‘똥포’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명랑한 병영생활을 누리시는 장교와 사병 이하 여러분들의 무운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