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아홉번째 이야기> 7월의 끝, 8월의 시작

하피즈 2010. 3. 26. 16:31

 

 페로돈 고개의 순례자

 

 나는 산티아고를 향해 걸었고 그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진정한 산티아고를 향한 걷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걷는 동안 아주 작은 일부가 바뀌었고
그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그나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작은 변화마저도 언제 제자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니며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바깥에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들이 있는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반성했다.
언제가 나는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갈 것이다.


걸어야 할 그곳이 산티아고가 아니라도 좋다.
그곳에서...
바뀌지 않은, 그리고 바꾸어야 할 
나머지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켜 나갈 것이다.

 

-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난 후.... 正往에서

 

 

 새벽별이 빛나는 하늘

 

 

어둠은 멀리서부터 물러나고 가까운 곳에서 오래도록 머문다. 까미노를 걸은 지 일주일. 매니와 스티브, 에리카의 발가락에는 물집이 잡히고 매일 저녁 그 물집을 터뜨리면 그 자리에 새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어느덧 우리 사이에 자리잡은 침묵의 크기는 물집의 수와 비례했다..

 

 

길을 걷다 돌아보는 매니

 

길에 선 매니, 빌리, 스티브

 

새벽에 숙소를 나설 때는 함께였지만 서로의 간격은 시간이 갈수록 멀어진다. 매니와 스티브, 빌리가 주로 앞장을 선다. 그 뒤를 내가 따르고 에리카는 점점 뒤로 처진다. 발가락에 잡힌 물집 탓이다.  빌리와 마리벨이 헤어졌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늘 유쾌하던 빌리도 헤어진 마리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순례 길의 첫 고비인 일주일 째. 비아나Viana를 거쳐 로그로뇨Logrono가는 길에는 끝도 없는 폭염이 쏟아지고 포도는 속으로 깊이 익어 갔다.. 

 

 포도밭

 

뒤늦게 도착한 에리카는 로그로뇨Logrono에서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았다. 빵과 생선, 샐러드를 만들 과일과 야채와 참치 캔, 코끼리도 취할 만큼의 포도주와 맥주를 샀다. 떠들썩한 점심 식탁에 그동안 길에서 낯을 익혔던 순례자들이 끼어든다. 도쿄에서 살며 영어를 가르쳤다는 찰리도 그들 중 하나다. 찰리를 만난 에리카가 그리웠던 모국어로 수다를 떤다. 포도주를 두 병째 비우자 눈물로 쏟는다. 포도주가 심장을 뜨겁게 만들고 눈시울이 붉게 물들인 탓이다. 일본인들은 왜 이곳에 보이지 않는지, 무엇 때문에 영어도 서툰 자신이 동행을 원했는지, 발가락에 잡힌 물집은 왜 그리도 쓰리고 아픈지 서럽고 억울했던 게다. 갑작스런 에리카의 울음에 찰리가 당혹해한다. 알베르게 소등 시간이 11시를 넘어서까지 에리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온전한 자기 몫의 그리움이자 외로움인 까닭이다. 빌리가 마리벨과 헤어졌던 것처럼 우리의 동행도 그 끝이 다가왔음을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알았다.            

 

 

나바레테 Navarrete

마른 그림자가 길 위에 떨어진다. 한 낮 대지에 피어오르는 열기는 흙이 숨을 고르는 소리다. 경사가 느슨한 언덕을 오르내리는 동안 햇살은 고르게 대지에 내려 그림자는 자취를 감춘다.

 

 

풀들이 스스로 야위어가고 바람은 먼지를 불러 모으며 저쪽으로 달아난다. 아침부터 다리를 절룩대던 에리카는 30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찰리와 동행할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기다림의 짜증을 에리카의 변심(?)과 맞바꾼 것이다.

 

나바레테 

 

간 밤 폭음의 여파는 다음날 가야할 거리로 나타났다. 로그로뇨에서 13km 떨어진 나바레테까지만 걷자는 나약한 타협안에 기다렸다는 듯 모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정오가 되기 전 목적지인 나발 테에 도착한다. 조금은 민망한 얼굴로 문을 열기 한참전인 알베르게 앞에 슬그머니 배낭을 줄 세우고 나바레테 길목에서 에리카를 기다린다. 에리카는 한 시간 쯤 아픈 발을 이끌며 걸어온다. 우리의 얄팍한 예상과는 달리 에리카는 혼자였다.

 

 나바레테 공원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장에서 바게트 빵과 치즈, 과일을 사들고 공원으로 향한다. 쓰린 속을 퍽퍽한 빵으로 달랜 후 알베르게가 문을 열 시간에 맞춰 돌아가려 했으나 에리카가 드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더 걸어갈게. 내가 너무 늦게 걸어서 방해가 된 것 같아.’

비록 서툰 영어였지만 에리카의 뜻은 분명했다. 에리카는 나바레테의 알베르게까지 따라와서 이별을 하며 또 눈물을 흘린다. 참 눈물이 많은 아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에리카와 함께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구실로 나는 야박하고 냉정했다. 우리가 마지막 본 에리카의 마지막 모습이다.

에리카를 보낸 후 거리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와 숙녀들이 무리를 지어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이 날 성당에서는 한쌍의 신혼부부가 결혼을 했고 영원한 결합을 의미하는 웨딩마치가 즐겁게 울려 퍼진다. 갓 결혼한 남녀를 태운 신혼 마차가 어디까지 달릴지 내심 궁금했다.   

 

 

 

에리카와 스티브의 뒷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