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
밀밭
1817년 스탕달은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을 찾아간다. 스탕달의 걸음은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앞에서 멈춘다. 스탕달은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고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기오까지 여행>에 회고한다.
19세기 초반부터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관람하다 스탕달처럼 어지럼증을 느끼고 기절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있었다. 1979년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라지엘라 마게리니(Graziella Magherini)가 이런 사례들 약100여 건을 조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정신의학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정신질환과 통계열람 DSM>에서 스탕달증후군이 아직 공인된 정신병(?)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기재될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좀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가슴이 뛰시나요?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면서 과연 심장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댈까? 2005년 피렌체를 여행하며 우피치 미술관과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조금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솔직히 말한다면 전혀 나는 스탕달과 유사하거나 조금이라도 비슷한 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수성이 부족했던 탓일 것이다. 간혹 바그너나 브람스에 압도당해 전율한 기억은 있지만 병적으로 심각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감동’의 수준일 뿐이다. 스탕달은 그림 때문이 아니라 베아트리체 첸치의 가족 잔혹사殘酷史(아래 주 참조)가 떠올라 다리를 후들댔던 것은 혹시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티아고를 걸으며 스탕달 증후군과 같은 증세가 가끔 나타난다. 추수가 끝난 황금빛 밀밭 그 속살에서, 너무 짙어 낯부끄러운 해바라기의 꽃잎에서, 소박한 예배당, 노부부의 나른한 휴식들...하늘을 바라보자 다리가 후들대고 심장이 가빠온다. 밀짚이 마르는 냄새가 바람결 마다 묻어있다.
길은 밀밭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고 풍경들도 길을 가만히 내준다. 풍경에서 마음으로 길이 들어온다. 저 이글대는 태양은 내 몸속의 독소를 태워버리고 속옷을 적시는 땀은 욕망의 잔해들이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소실점 안으로 사라지는 꿈을 꾼다.
끼니의 사이가 길어질수록 아찔함이 더해온다. 혼몽하고 아득한 기분의 정체는 결국 허기란 놈이다. 피 안에 당糖이 떨어지니 헛것이 보인다. 주전부리라도 달고 다니며 짬짜미 채워줘야 할 것을 미련하게 귀찮다고 마냥 맹물만 들이킨 덕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인 피렌체도 매한가지다. 그림에 취해 정처 없이 걷다보면 때를 거르기 일쑤다. 허기인지 미美에 취한 것인지 분명히 살펴야 한다. 끼니를 거르면 어지럽고 심장이 뛰며 헛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끼니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점심은 주로 바게트와 초리조Chorizo, 저녁은 파스타와 빵, 과일 등속이다. 파스타라고 해봐야 거창할 것 없다. 다진 마늘을 올리브기름에 볶은 후 토마토 프리토와 함께 휘저어 10분간 졸인 후에 삶은 국수가닥을 소스와 함께 비비는 정도다. 싱싱한 바지락과 마늘을 곁들인 해물 파스타도 간혹 등장할 때도 있다. 파스타가 사랑받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가장 싸고 간단해서다. 요리는 주로 스티브와 매니가 도맡고 나는 매일 마늘을 다지고 양파와 감자 껍질을 벗기며 설거지를 책임진다. 내가 파스타를 아무리 잘 만든다한들 그들보다 솜씨가 낫겠는가? 스티브가 된장찌개를 끓이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덕분에 입에 물리도록 매일 파스타를 먹기는 하는데...문제는 올리브 오일이다.
아무리 작은 병도 1리터가 넘는데 3~4인분 파스타의 마늘과 토마토 프리토를 볶는데 쓰는 올리브 오일은 기껏해야 한 병의 삼분의 일. 남은 기름은 결국 누군가 들고 다녀야 하는데 55리터짜리 큼지막한 내 배낭이 제일 만만하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 생각하지만 저녁을 먹은 후 기름이 많이 남으면 은근히 약이 오른다. 마실 물조차 버거운 판국에 한 병 가득한 기름을 볼 때 가슴이 얼마나 느끼하고 찐득하며 또 철렁하랴? 그렇다고 변변한 요리 솜씨도 없는 주제에 그런 잡일마저 마다할 수는 없지 않은가? 느끼한 기름이 들어간 음식을 지독히 싫어해 튀김 닭도 쳐다보지는 않던 내가 저녁때 마다 올리브 좀 많이 넣자고 성화다. 스티브와 매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밴댕이 같은 내 속을 들여다 볼 재간이 없다. 나는 지금도 올리브기름 병만 보면 가슴이 울렁댄다. 산티아고에서 얻은 올리브 증후군이다.
(요리에 집중하는 바람에 스티브의 파스타 그림이 없습니다. 많은 이해 바랍니다 ^^)
** 주 베아트리체 첸치의 잔혹한 가족사
베아트리체 첸치는 이탈리아의 귀족 프란체스코 첸치의 딸이다. 프란치스코 첸치는 아내와 그의 아들들을 학대하였고 딸인 베아트리체와는 근친상간을 벌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아버지에 의해 지방의 성에 감금된다. 복수를 꿈꾸던 베아트리체는 이복 형제와 계모, 하인들과 공모하여 프란체스코를 살해하고 실족사로 위장하지만 이들의 음모는 결국 들통이 나며 모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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