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열다섯번째 이야기> 뻐꾸기 둥지를 넘어 갈리시아로...

하피즈 2010. 4. 13. 15:39

 

 

뻐꾸기들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새끼들은 남의 둥지에서 자란다.

다른 새의 어미들은 뻐꾸기를 자신의 새끼인 줄 알고 키우다 자신의 새끼들을 굶어 죽이고 만다.

그러나 다른 새들이 모두 죽고 둥지가 사라진다면 뻐꾸기도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이 뻐꾸기의 운명이다. 

....

 

 길 위의 사람들은 결코 그곳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만하린에서 폰페라다 가는 길 

 

만하린의 서쪽 사면은 동쪽에 비해 가파르고 계곡은 깊다. 대서양은 아직 멀고 아득하지만 바람 속에는 물기가 얕게 스며있다. 유럽 대륙에서 피레네를 넘은 바람은 메마르고 뜨겁다. 산맥은 사람 뿐 아니라 바람과 비의 성질도 바꿔놓는다. 누렇게 뜬 황량한 언덕과 물길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계곡, 즉 시에라는 스페인 내륙의 대표적 풍경이다. 산맥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언덕을 만들었고 언덕은 척박해 사람의 접근을 막아낸다. 밖으로부터 시작된 고립이 안에서 새로운 고립을 만들어낸다. 내가 황량함에 매혹되는 이유는 사방이 트였으면서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가엾음과 연민 때문이다. 아무 것도 껴안지 않고 그래서 결국 버릴 것도 없는 운명. 스페인 사람의 내면에는 그런 쓸쓸한 표정이 조금씩 묻어있다. 스페인의 안쪽은 황량하지만 바깥으로 나갈수록 화려하고 풍요롭다. 카스티야의 서쪽도 마찬가지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갈수록 꽃은 흔하고 나무들의 키도 크다.

 

 

 

엘 아세보 마을 풍경

 

짙은 청색 편마암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언덕 중턱 좁은 평지에 모여 있다. 엘 아세보 El Asebo마을이다. 그리고 멀리 시선을 던지면 우묵한 분지에 자리한 폰페라다Ponferrada시의 모습도 들어온다. 무궁화만 드문드문 피어있는 앨 아세보 마을 골목은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고요하다. 집들은 하나같이 납작한 돌로 두텁게 벽을 쌓고 2층에는 개방된 나무 발코니를 지었다. 카스티야 지방의 전형적인 농가들이다.

 

 

카스티야의 농가

 

이른 아침 골목은 순례자들의 발길로 수선하다. 느지막이 길을 떠나는 이들, 아침밥을 들고 골목으로 나온 이들, 아침 햇살이 말없이 이들을 지켜본다. 마치 텃새가 떠난 둥지에 철새들만 시끄럽게 조잘대는 꼴이다. 한가로운 농촌의 아침이니 그렇겠거니 하지만 뒤통수가 좀 서늘하다. 카스티야 지방의 외진 시골이라지만 침울한 노년의 모습 같아 안스럽다. 불과 300년 전 유럽과 대서양의 패자로 군림했던 제국의 몰락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었던 한 해였다. 그라나다의 함락으로 무려 800년 동안 지루한 공방을 벌였던 레콩키스타가 마무리 되었고 그 해 8월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라는 사내는 동방의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서양에 세 척의 배를 띄웠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국왕의 결합은 스페인에게 더할 수 없는 축복이었고 그동안 안에서 반목을 거듭해왔던 갈등의 종식을 의미했다. 스페인은 비로소 하나의 종교, 하나의 국왕 아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질풍처럼 몰아치는 기독교 왕국의 칼은 무슬림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했고 거꾸로 아메리카에는 몰락한 귀족과 도시의 부랑아, 건달들을 십자가의 이름 아래 보내 그 곳에 살고 있던 인디오의 95%를 살육하거나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메리카에서 수탈한 금과 은으로 엄청난 부富를 축적했고 아메리카는 물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까지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계의 제국으로 눈부시게 부상했다. 주변 국가는 물론 스페인인 자신도 꿈꾸지 못했던 세계 제국의 신화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로마도 이룩하지 못했던 꿈이 궁벽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축복이었고 영광임을 스페인인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새의 둥지를 빼앗은 뻐꾸기가 망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절정은 몰락으로 이어진다. 
거듭된 신의 은총은 인간을 광신의 길로 이끈다. 성공에 도취된 자에게 그의 길은 절대 선이며 진리다. 종교재판소를 세워 이단자의 살을 불로 지지고 마녀를 불태웠다. 피레네 산맥 너머에서 종교개혁을 향한 루터의 깃발이 오르고 앙시앙 레짐의 종말과 함께 길로틴에서 루이 16세의 목이 베어질 때 마드리드는 문을 더욱 굳게 닫았다. 세계 제국은 스스로 부여한 역사적, 기독교적 소명에 사로잡혀 고립의 길을 택했다. 변화를 거부하고 정체를 선택한 권력의 운명은 몰락이다.     
신대륙에서 강탈한 황금이 부르주아 계급과 도시를 탄생시켰지만 역설적이게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카스티야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카스티야의 제도와 법률들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재빨리 산업화의 길을 걸은 산업화한 해안 도시에 모든 인력과 자원을 빼앗긴다. 20세기 초 스페인의 몇몇 지식인들은 뒤늦게 빈곤과 나태에 빠진 카스티야에서 ‘유럽적인 것’에 맞설 수 있는 ‘스페인적인 것’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의 둥지는 이미 털린 이후였다.  

 

 

 

풍경과 취미

 

몰리나세카 길목의 다리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풍경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가끔은 지쳐 땅만 쳐다보며 걸을 때도 있지만 그런 길은 참 빈곤하다. 풍경은 가만히 주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이 그렇듯 걷는 다는 것은 단순하게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깥과 내 안의 빈자리를 발견하고 빈 여백을 채워나가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다수가 혹은 소수가 흥미를 느낄만한 새로운 사실일 수도 있고 이미 알려져 있고 누구나 알고 있다고 믿겨지는 사실일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후자에서 권태와 지루함 혹은 진부함을 느낄 수 있다. 불행하게도 길은 늘 새롭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스페인의 우체통

 

만약 내가 스페인 부엌 구조와 종류라든가 하다못해 우체통의 색깔과 가짓수 같은 것에 열정과 관심을 가졌더라면 순례는 더 흥미진진하고 지적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수에 따른 스페인 부엌의 평균 면적과 하루에 만드는 음식의 종류와 양, 숟가락과 포크의 평균 개수를 면밀히 조사한다든지 조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본 우체통의 구조와 아름다움을 재조명한 결과를 갖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스페인 부엌을 사랑하는 모임’ 혹은 ‘한국우정사업본부’에서 특별회원 추대라든가 ‘우정’어린 감사패 하나 정도는 순례의 덤으로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껏 내가 가졌던 일관된 취미라고는 초등학교 시절 다소 불순한 투기적 목적이 개입되었던 우표수집 밖에는 없다.  우표 수집을 취미로 가진 분들에겐 참으로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표 수집만큼 따분하고 한심스런 취미는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1947년 콩고 공화국에서 5천매 한정판으로 발매된 0.5프랑짜리 우표가 있다고 치자. 그런 우표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한국에서 발행된 우표의 가짓수만 해도 내가 먹어본 반찬의 가짓수보다 100배는 많을 것이다. 혹시 우체국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음모는 아니었을까? 정작 편지는 한통 쓰지도 않던 내가 왜 그런 짓을 벌렸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우표 수집이란 무모한 취미는 우표가 동전보다 흔하면서 한 푼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포기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뒤늦은 후회지만 양치식물 관찰이나  버섯기르기 등 고상한(?) 취미만 가졌어도 까미노 순례길이 한결 풍요로울 것임이 분명하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엘 아세보에서 한 시간 쯤 더 내려와 낀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 길목 다리를 건넌다. 마을 오른 편으로 실Sil강이 완만하게 흐른다. 경사가 느슨한 평지로 접어든 것이다. 다리를 건너 큰 길을 따라 양쪽에 상점과 집들이 늘어서 있다.  알베르게 표지판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피며 걸었지만 순례자를 위한 숙소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마을의 중심인 성당 인근에 알베르게가 있겠거니 짐작한다. 마을을 벗어나도 알베르게를 찾을 수 없어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에 다시 길을 되돌아 오른다. 여행자를 위한 작은 빤시온Pansion만 눈에 뜨일 뿐 역시 알베르게를 찾을 수 없다. 생장 피에데 포르에서 받은 지도에는 분명 모리나세카에 두 곳의 알베르게가 있다고 나와있으니 마을 구석 어딘가엔가 숨어있을게다.

 

 

몰리나세카 마을 서쪽 입구 산티아고 석상

 

 

몰리나세카에서 7km 더 떨어진 도시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걸어갈 시간과 체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바로 전 날 숙소를 잡지 못했던 따끔한 교훈도 있고 메세타를 건너 뛴 덕분에 일정에도 여유가 있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가능하면 큰 도시 보다는 작은 마을에 머무는 편이 여러 면에서 좋다. 도시의 숙소는 시설은 좋은 편이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번잡하다. 새벽부터 화장실을 쓰기 위해 기다리고 또 뒷사람의 눈치를 보기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중 가장 불편한 것은 부엌이다. 하루 세끼를 꼬박 빵과 과일로 때우거나 사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한 두 끼는 손수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얘긴데...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스티브와 함께 다닐 때는 일행의 몫까지 음식을 만드니 미안함이 그래도 덜하다. 그러나 나 하나를 위해 불을 쓰고 그릇을 닦는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음식이란 것이 사람 몫에 따라 그릇의 크기만 다를 뿐 들이는 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후미지고 작은 알베르게를 찾아 남들보다 한 두 시간 앞서 부엌을 쓰고 때가 되면 자리를 비운다.

 

 

폰페라다 다리(폰페라다는 철로 만든 다리라는 뜻이라는데 아무리 보아도 돌로 만든 다리 같다)


몰리나세카의 알베르게는 마을에서 서쪽으로 1km 쯤 떨어진 실Sil강 옆 도로변에 있었다. 마을을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알베르게의 위치를 알아냈다. 알베르게에 짐을 맡기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국수(스파게티 면)와 빵과 초리조, 복숭아 몇 알을 산다. 얼른 돌아가 불을 쓰고 그릇을 닦아놓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걸음이 빨라진다.

 

 

템플 기사단 성castillos de los templarios

 

폰페라다 역시 산티아고 순례길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도시다. 도시 안에는 템플 기사단 성castillos de los templarios과 무사라베 양식의 성당 등으로 유명하다. 그다지 활기가 넘친다고 볼 수 없는 경직되고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다. 로마 시대부터 철과 석탄을 캐었고 근대 이후에도 이들 산업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다. 폰페라다 역시 산업도시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을까? 쇠락의 스산함이 도시 곳곳에서 배어있다. 십자군 고성도 외면하고 목적지인 카카벨로스Cacabelos로 총총히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