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에게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신화가 숨쉬는 숲. 갈리시아
프랑스 길의 마지막 고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에서 길은 갈리시아Galicia 땅으로 접어든다. 비아프란카 델 비에르조에서 오 세브레이로까지는 이틀을 꼬박 걸어야 한다. 오 세브레이오에서 산티아고까지 남은 일주일. 순례는 그 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서울에서 대전 만큼의 거리도 일주일의 시간도 아니다. 비워야할, 버려야 할 수많은 욕망과 미련 속에서 비쩍 마른 수심修心만 남아있다. 닦아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공간을 채우는 것만으로 시간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될 것이다.
무성한 밤나무 가지가 서늘한 그늘을 만든다. 초록은 산을 에워싸고 순례자들은 초록의 품안으로 걸어간다. 이 산의 비탈과 굽이는 순하고 어질지만 순례자의 숨은 차고 가파르다. 비가 잦아 갈수록 숲이 깊어진다. 메마른 황토에 익숙했던 몸이 젖고 쓰려오자 마음이 그늘로 들어선다.
앞서 가는 이의 등이 외롭다. 평생 눈길 한번 주는 법 없이 아파도 안아주지 못하고 고작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심지어 매를 맞을 때도 시린 뼈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래도 등은 차갑고 배기는 바닥을 군소리 없이 견뎌낸다. 순례길에서 내가 가장 많이 보았던 것은 십자가도 이정표도 아닌 바로 이 타인의 등이다. 지치고 외롭고 힘들어 굽고 무너져가는 앞선 자의 등이다. 길은 타인의 등을 보라 조용히 이른다. 사람은 자신의 등을 안을 수 없지만 타인의 등을 어루만지고 감쌀 수 있다. 그리고 기꺼이 내 등을 내주는 믿음도 필요하다. 나는 길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자신에 대한 교만을 반성한다.
오 세브레이로로 가는 산길 입구
가파른 길이 완만하게 기울자 소똥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마을이 가까운 것이다. 마지막 고비라는 생각 때문인지 걸음이 힘겹고 벅차다. 하늘을 가렸던 숲이 물러나자 능선이 다가온다. 출렁이는 언덕아래 마을은 꿈결 같다. 좁은 숲길을 벗어나자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 능선위에 자리한 마을 라구나 데 카스티야다. 이 마을을 벗어나면 까미노의 마지막 여정 갈리시아 땅이다.
갈리시아 표지석
내 몸의 등이 추운 변방인 것처럼 갈리시아Galicia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 귀퉁이 외곽이다. 기원적 6세기 켈트족와 게르만족, 로마인, 수에비아족 등 다양한 종족들이 이 땅을 침략했고 흔적을 남겼다. 그들 중 켈트족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어 갈리시아의 신화를 창조했고 말과 노래를 남겼다. 갈리시아Galicia의 '갈gall'이 켈트Celt 또는 골Gaul에서 나온 단어라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졌다. 즉 갈리시아란 켈트족의 땅이란 뜻이다. 낮은 파도처럼 몰려다니는 구릉아래 풀들이 자란다. 갈리시아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곳에서 가축을 풀어 길렀고 겨울에는 짐승들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갈리시아는 수세기 동안 북쪽과 서쪽은 바다에 나머지는 산에 둘러싸인 고립과 은둔의 땅이었다. 이 땅의 운명은 산티아고(성 야고보)에 의해 완전히 뒤바뀐다. 공교롭게 그 시작은 8세기 무어인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에서 비롯된다. 아랍인들의 스페인 침략에 기도교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서 산티아고 성인이 전도를 했었다는 믿음으로 맞선다. 천사에 계시에 의해 산티아고의 묘가 발견되고 알폰소 3세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자리에 대성당을 지으라고 명한다. 무어인들이 남에서 북으로 올라온 것과 반대로 방향으로 레콩키스타는 갈리시아를 기점으로 북에서 남으로 퍼져나간다.
산티아고의 부활과 함께 고립의 땅 갈리시아가 긴 잠에서 깨어난다. 성인과 왕, 기사와 평민, 걸인들도 산티아고를 향한 성지 순례를 떠난다. 놀라운 변화들이 길에서 시작된다. 순례자의 물결과 함께 서유럽의 문화가 전래되고 갈리시아의 노래와 시, 민담과 전설들이 부활했다. 갈리시아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세상의 끝에서 시작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갈리시아 사람들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과거를 풀어내고 궁벽한 시골을 성스러움으로 덧칠했다. 세상은 가장 어두워 별이 빛나던 곳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한다.
능선 아래 마을
순례자들이 힘겹게 산을 올라온 오 세브레이로 마을은 해발 1,300미터가 넘는 산골마을 답지 않게 번듯하다. 교회를 중심으로 길 양편에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거의 고개 정상이기 때문에 바람이 다소 세차게 불지만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힘들여 고개를 올라온 순례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된다. 마을까지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를 자동차로 달려와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여기저기 눈에 띈다. 지리산 노고단의 정상의 풍경과 비슷해 왠지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대목이다.
깊은 산에 뚫린 도로 덕분에 몸은 편할지 모르나 마음은 불편하다. 멀리 그리고 느리게 돌아야할 길을 뚫고 질러서 빠르게 간다. 도시는 가까워질지 모르나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얕아진다. 단 한 시간을 걸어도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는 길이 있지만 차에서 사람들은 하루를 함께해도 타인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가장 큰 미덕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데 있다.
순례자들이 몰리는 여름철 오 세브레이로 알베르게는 늘 만원이다. 알베르게가 열리기 한참 전부터 순례자들의 배낭이 줄줄이 늘어서 알베르게를 빙 두른다. 비교적 늦게-그래도 알베르게가 열리기 전-도착한 사람들은 열심히 배낭 수를 세고 자신이 빈 침대를 차지할 수 있을지 헤아린다. 씁쓸한 일이지만 산티아고를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침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코카콜라는 산티아고 길을 후원하는 대가로 길 곳곳에 자판기를 설치했다.
오 세브레이로의 알베르게는 세련된 외관과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층과 2층에 크고 작은 침실과 전자렌지가 딸린 작은 식당이 있고 경사면 아래 지층에는 샤워 및 세탁실 그리고 제법 큰 부엌 겸 식당도 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불을 쓸 수는 있지만 냄비 몇 개만 있을 뿐이다.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었을 게다. 마을에는 갈리시아식 뽈뽀 요리를 만드는 바르Bar도 있으니 한번쯤 먹어볼 만도 하다.
높은 산의 기후가 그렇듯 오 세브레이로의 하늘도 변덕이 심하다. 눈이 찌를 듯 강렬했던 태양도 오후에 접어들자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춘다. 대서양의 습하고 찬바람과 내륙의 뜨겁고 마른 기운이 능선위에서 만나 부딪히고 엉키며 예측하기 힘든 변화들을 만들어낸다. 강한 비바람과 짙은 안개로 순례자들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험악한 날씨는 오 세브레이로를 외부와 단절시키기도 했지만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한다. 9세기에 건축된 산타 마리아 성당에는 폭풍우가 치던 밤 홀로 미사에 참석한 농부에게 내린 영성체(밀떡)와 포도주가 진짜 살과 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성당 제단에 그 영성체와 성배를 제단 한쪽에 전시하고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적’을 보기위해 산타 마리아 성당을 찾는다. 적막한 한낮 바위가 품었던 열기가 저녁 무렵 한꺼번에 쏟아진다. 바람은 순식간에 산위로 구름떼를 몰고 온다. 밤이 되자 한꺼번에 바람이 되어 쏟아진다. 밤새 바람이 울어대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아침 5시. 어김없이 눈을 뜬다. 온 몸의 근육과 살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나는 의지 하나로 버티고 저항하는 몸을 물리쳐야 한다. 거의 한달 째 걷지만 그래서 아침은 늘 전쟁이다. 새벽 4시부터 화장실을 드나들고 배낭을 부스럭대는 사람들 덕분에 온전한 잠을 이루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사람들을 길로 이끄는 까닭은 저마다 다르다. 모두 절실할 것 같지만 밥벌이에 비한다면 대개 보잘것없는 이유들이다. 그럼에도 새벽부터 아우성이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또 터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맹목과 고집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것들의 경계는 말이 될 때 더욱 모호하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왜 걷는가?’라는 물음에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똑같은 물음을 나에게 던진다.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걷는가? 무엇이 나를 걷게 하는가?
길은 오로지 몸이 하는 말에 귀를 열어준다. 몸은 길에서 조금씩 깨어나며 이런 저런 말을 건넨다. 천천히 오래 걸을수록 그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진다. 반복은 박자를 낳고 박자는 흐름을 만든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걷기다. 걷는 것은 수단과 방법이지만 동시에 목적이며 결과다. 산티아고를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산티아고를 걷는 것이 목적인 것과 같다. 목적이 방식에 적응을 한다. 걷기는 동기이자 이 길의 궁극적 종착지다.
해뜨기 전 산길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그 흔한 손전등 하나 없이 그저 앞서 걷는 사람들의 불빛과 발자국 소리에 의존해 산길을 간다. 숲은 안개로 가득하고 어둠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순례자의 지팡이 소리는 완강한 새벽 어둠을 뚫고 숲으로 멀리 퍼진다. 갈리시아는 신화의 땅으로 순례자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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