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열여덟번째 이야기> 식물의 시간

하피즈 2010. 4. 21. 17:28

 

 

 

 

밤 새 차가워진 땅의 냉기가 자욱한 장막을 만든다. 추위에 포착된 물방울들이 모여 숲을 에워쌌다. 나무들이 피운 잎들과 꽃들 위로 안개가 내린다.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는 사이에 식물들은 자라고 꽃을 피우며 교미를 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들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과 동물의 시간은 짧고 그래서 빠르다.

 

 

 

 

나무는 길게 그리고 오래 늙는다. 길게, 그리고 오래 보지 못하는 나는 나무의 시간을 알 수 없다. 나무가 싹을 틔우고 자라며 열매를 맺는 동안 짐승들은 분주히 이동하고 쓸모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한다. 그러나 식물은 한 곳에 뿌리를 내려 신중하게 움직이며 바람과 곤충, 동물들에 그 후손을 맡겨 멀리 날아가고 먼 훗날을 도모한다.  식물과 사람은 같은 공간을 차지하지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모든 동물과 식물, 균류와 지의류들까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시계를 갖고 태어난다. 떡갈나무와 바오밥 나무는 4,000년을 넘게 살며, 자작나무는 4~50년, 로즈마리는 여러 해를, 채송화는 1년을 산다. 사람은 길어야 100년을 산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의 모든 시계를 인간을 중심으로 맞춰 놓으려 한다. 1년에 1cm밖에 자라지 않는 지의류에게 24시간짜리 하루는 너무 번잡하고 하루만 피고 지는 꽃에게 1년은 지나치게 길다.  

 

 

 


숲에 들어갈수록 시간은 점점 단순화된다. 분 단위의 개념은 물론 하루를 24시간으로 잘게 나눌 이유도 없다. 자는 시간, 걷는 시간, 노는 시간 이렇게 세 개로 나누면 충분하다. 이 시간 사이에 밥 먹고 배설한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시간을 잘게 나누어 같은 부피 안에 가두려는 시도는 불온하다. 걷는 동안 나는 도시로부터 멀리 떠난다. 단순하게 몸에 보다 가까운...그렇게 인간의 시간에서 식물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식물은 생명을 다하기 전 자신과 똑같은 자손을 남긴다. 과거의 생명은 죽음으로 후대의 길을 트고 거름이 된다. 수많은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도 전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썩어 균과 미생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것들은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수천 년의 시간을 기다린다. 인간이 시간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한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갔을 뿐이다. 누구나 재가 되거나 썩어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물들에 해체되고 결국은 식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식물의 시간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한 소멸과 부활의 작은 과정일 뿐이다.         

 

 

 


사리아Sarria는 갈리시아에서 제법 큰 도시다. 안개가 모두 깊은 숲으로 들어간 오후 어느새 발걸음이 사리아에 이른다. 12시 갓 넘긴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리아의 공영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들의 배낭들이 벌써 긴 줄을 만들었다. 길을 걸으며 만났던 순례자 몇이 웃으며 손짓한다. 기다리는 사람들로 보아 지금이라도 줄을 선다면 내 차례까지 침대를 차지할 수 있겠지만 조금은 덜 혼잡한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나선다. 사리아는 크고 이곳에서부터 출발하는 순례자들도 많기 때문에 사설 알베르게의 수도 제법 된다. 공영 알베르게에 비해 다소 비싼 요금-8유로-이지만 부엌과 화장실을 비교적 편하게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현금 인출기에서 빈 지갑을 채우고 오랜만에 큰 슈퍼마켓에 들러 장도 본다. 값싸고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배낭을 욕심껏 채운다면 길이 고달파진다. 그렇기 때문에 알베르게의 냉장고 안에는 늘 앞의 사람들이 남기고 음식과 재료들이 남아있다.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들고 가기에는 무거운 음식들을 타인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혼자 걷는 순례자들은 남긴 음식만 먹고 다녀도 충분할 정도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나눌 줄 알아야한다. 그래야 순환이 된다. 마치 겨울이 오면 나무가 스스로 잎을 떨고 버려진 잎들이 다른 생명들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의 길 위에 있으며 다른 몸들로부터 생명을 얻고 언젠가는 다른 생명을 위해 내 몸도 주어야 된다는 자명한 이치를 식물에게 배운다. 

 

 

 

 

꿈인 줄로 알았다. 낯익은 한국말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다섯 시. 해뜨기는 조금 이른 시간 분명 창 밖에서 젊고 쾌활한 한국말이 새벽 어스름을 타고 창을 넘어 들어온다. 궁금하고 반갑기도 한 마음에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열 명씩 무리를 이룬 한국인들이 보인다. 오랜만에 모국어로 인사를 하고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가톨릭 서울교구에서 모집한 산티아고 순례단이다. 간혹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학교나 단체로 순례길을 찾은 이들은 종종 보았어도 다른 나라 그것도 한국에서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대규모 순례단이 산티아고 찾다니... 산티아고 가는 길이 한국에서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 중 몇과 걸으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일주일 예정으로 사리아에서 출발했으며 순례를 마친 후 나머지 시간은 포르투갈 성지 순례를 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숙소와 식당은 스페인어가 능숙한 한국인 가이드가 사전에 예약을 한 상태. 이러다 여름철 피서지의 숙박 전쟁이 산티아고에서도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과 우려가 반반쯤 섞인 한숨이 절로 나온다. 순례의 방법이나 목적은 누구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단 무엇이 진정한 길인가?에 대한 물음과 그렇게 선택된 길이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명확해야 한다. 사리아에서 포토마린까지 가는 길도 여전히 짙은 안개와 숲들로 어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