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들판에 서다
홀로 들판에 선 적이 있는가?
어둠의 저쪽, 별빛이 흘러내리는 어깨 너머 하늘과 세상이 이별하는 지평선을 향해 선다.
떨리는 심장 고동이 피곤에 눅은 몸으로 조금씩 퍼진다. 가슴이 먹먹하다.
뚜렷하게 알 수 없는 무엇이 가슴의 안쪽에 조금씩 맺힌다.
한 달 전 아니 바로 어제 걸었던 길들이 거짓말처럼 아득하다.
무의식적으로 서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걸음은 생명의 일부가 된다. 숨결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아간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지나온 길 위에 소중한 무엇을 버린 것은 아닐까?
알지 못할 상실감이 발목을 붙잡는다.
짐짓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대지만 침묵보다 쓸쓸하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13.5km.
이정표 앞에 멈춰 서서 이 길의 나머지를 걸을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길에서 무엇을 보았고 누구를 만났는가?
이루지 못한 꿈들이 거기에 있었던가?
떠나기 전보다 더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별을 빛내기 위해 어둠은 저리도 깊은가?
나는 결국 새벽별이 차가운 들판에 서고 말았다.
그리고 울어지지 않는 울음을 울고 불러지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우듬지만 내민 채 숲은 안개에 잠겼다.
저 숲 너머 별이 빛나는 들판 ‘콤포스텔라Compostella'.
무성한 안개를 헤치고 사람들은 이 길을 천 년간 걸었다.
아마 내일도, 다가오는 천년도 인간은 이 길을 걸어 갈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꿈과 희망들이 이곳에 뜨고 또 저문다.
인간의 진정한 꿈은 무엇인가?
산티아고로 가는 마지막 길목 ‘몬테 델 고조Monte del Gozo'.... 기쁨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당연히 누려야 할 기쁨이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섬뜩한 새벽 추위가 살갗을 적실 뿐 이다.
안개가 걷히자 길은 더욱 선명해진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몬테 델 고조다.
산타 이레네에서 불과 3시간 거리.
몬테 델 고조 언덕에 오르면 산티아고가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몬테 델 고조 언덕
등 뒤로 떠오르는 아침 해와
늘 서쪽으로 기울어 한 발 앞서 길을 이끌었던 그림자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온다.
기쁨은 누리고 이별은 미루어야할 일이다. 언덕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이 순간을 잘게 나누고 아끼어 마음에 두고 싶었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여정의 끝에 남는 쓸쓸함을 떨쳐내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탓일까?
대형 새장같은 몬데 델 고조 알베르게 앞에 이른 아침부터 순례자의 줄이 길게 늘어선다.
절정의 순간 뒤에 찾아올 허무가, 한 점을 향해 치달았던 열망의 부재가 두려운 것이다.
순례자는 그 정점의 순간에서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버려야 한다.
아무도 정상에선 머뭇대거나 오래 머물 수 없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순례다.
순례는 삶을 닮고 삶은 또 순례로 이어진다.
전선에 매달린 순례자의 신발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지막 새벽.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고 나는 어제처럼 또 신발 끈을 조여 맨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그런 아침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언덕은 산티아고와 이어지고 나는 순례자의 뒤를 말없이 따른다.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혼자 남았는가?
산티아고 성당
가슴에 벅차오르는 기쁨을 품은 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광장으로 몰려든다.
다리를 절룩대며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홀로 걸어온 이들도
브라스 밴드와 깃발을 앞세우고 힘차게 진군하는 이들도
얼마 남지 않는 생을 뒤돌아보기 위해 걸어온 이들도 이곳에 이른 마음은 하나같다.
‘이곳이 산티아고다! 나는 결국 산티아고에 오고 말았다.’
산티아고 성당 앞 광장에는 천사들의 찬란한 마중도 사람들의 열광적 환영도 없지만
지금 이곳에 서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들은 모두 승리자이며 꿈을 이룬 자들이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을 누리고 또 기뻐한다.
먼저 도착한 이가 지금 들어오는 이들을 위해 박수를 쳐준다.
지금 들어 온 이들은 그들보다 늦게 오는 이들을 위해 박수를 쳐줄 것이다.
함께 걸었던 이들은 서로를 감싸 안아주며 아픔을 위로하고 또 이겨낸 벗들에게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고난과 유혹의 날들은 벗들이 있어 오로지 이겨낼 수 있었다.
어떤 보상도 계산도 따르지 않는 사랑과 우정...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선물을 이들은 길에서 받았다.
남루하고 초라하다.
몸에선 새우젓국 냄새가 나고 신발은 형편없이 흙에 더러워졌으며 바짓단에는 퍼런 풀물이 들었다.
그러나 순례자는 이 순간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순간을 누리고 있다.
나는 오늘 밤 남루한 모든 이들을 위해 축배를 들 것이다.
산티아고의 밤
더 나아가야 한다.
세상의 끝이 멀지 않다.
동쪽 끝에서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대륙의 서쪽의 끝으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넉넉지 않다.
세상이 내게 던진 무의미를 향해 묵묵히 걸어야 할 길만 남았다.
끝내는 걷고 살아내는 것이 희망이다.
나는 순례에서 희망을 배운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길 위에 선다.
세상의 끝... 피니스테라
(산티아고에서 서쪽, 대서양과 만나는 곳)
산티아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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