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의 추억, 그리고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
채울 수도 채워지지도 않는 운명은 애절하다.
- 알람브라를 추억하며....
슬픔은 떨리는 숲처럼 우수수 몰려와선 개별적 잎으로 흩어진다. 모든 것들이 완벽과 균형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영원한 신념과 믿음을 집요하고 치열하게 한 땀 한 땀 새겨 지상에 구현할 수 없는 천상의 궁전을 만든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순결한 눈이 녹아 궁전의 심장을 채운다. 그 차갑고 투명한 피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며 꽃이 핀다. 절정의 순간 태양은 숨 막힐 듯 고요하며 뜨거웠다.
1491년, 겨울이 깊어갈 무렵 이베리아 반도의 오랜 내전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제 반도의 남쪽, 마지막 이교도들이 버티고 있는 알람브라로 말머리를 돌려야 할 때다. 카스티야 군주의 기사의 칼끝이 남쪽을 향해 뻗었다.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마지막 진군이다.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알바이신 언덕에서)
이사벨 여왕을 얇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수백 년간 반목했던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여왕의 의지는 견고하다. 스페인인들은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군주 무함마드 12세를 '보압딜Boabdil'이라 낮추어 불렀다. 한 때 보압딜이란 자는 나스르 왕조의 권력 다툼에서 쫓겨나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던 자였고 그가 통치하던 나스르 왕국은 안달루시아에 남은 마지막 무슬림 왕조라고는 하나 카스티야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했던 속국에 불과했다.
알함브라의 외곽 성인 벨라 탑Torre de bella와 왼편에는 그라나다 시내
보압딜 즉, 무함마드 12세는 카스티야의 거듭된 굴욕적 조공을 거부하고 스스로 옥쇄의 길을 가고 있었다. 똘레도와 꼬르도바, 무르시아, 세비야, 차례로 함락되고 이 땅에는 오로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국, 알람브라 성만이 홀로 남았다. 기독교인들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사실상 13세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무어인에게는 남은 것은 오로지 그라나다 땅 일부와 굴욕적인 타협 뿐... 이사벨라의 카스티야 왕국과 페르난도의 아라곤 왕국이 결혼으로 통일되며 스페인은 하나의 제국으로 우뚝 선다. 무어인들이 700년 전 건너왔던 해협 저편으로 다시 쫓겨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 일 뿐이다.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Arrayanes
200년 전 나스르 왕조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앞둔 늙은 나무였다. 카스티야에 조공을 바치며 왕조의 운명을 이어오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는 그라나다 언덕에서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무슬림 왕조의 권토중래를 꿈꾼 것일까? 거대한 성벽과 탑이 시간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왕조는 그들이 패망하는 순간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궁전을 짓는다. 절망적 왕조의 운명을 짊어진 왕궁, 붉은 성 알함브라...소멸의 운명을 타고난 것들은 그 비극으로 더 처연하다.
알람브라의 달빛
그라나다의 오아시스 호스텔은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매일 북적였다. 오아시스는 사막이 아니라 아랍인들이 모여 사는 좁고 복잡한 골목의 한쪽 후미진 골목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물 담배 파이프와 현란한 문양을 가진 카펫 상점, 하랄Halal-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처리된 육가공 식품류-를 거친 양고기가 매달린 푸줏간을 지나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다.
유럽과 스페인에서 온 여행자들 제외한 나머지 동양권 여행자들의 열 중 아홉은 한국인이다. 숙소에서 일하는 직원이 한국인이 너무 많다며 엄살을 떤다. 갑작스런 한국인들의 집중공세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다. 식당에 모인 한국인들의 수다는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예닐곱이 아침에 떠나고 두셋이 남는다.
잠든 지 4시간 만에 눈을 뜬다. 주말이기 때문에 더 서둘러야 한다. 자칫 늦으면 오전에 배당된 표가 다 팔려 하루를 허탕 칠 수도 있다. 여행자들은 미리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한 후 방문한다. 알람브라로 올라가는 언덕은 완만하지만 생각보다 한참 걸어야 겨우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잘게 부서진 안달루시아의 아침 햇살이 제법 따갑다.
그라나다 거리
늦은 저녁 무렵 붉은 꽃잎처럼 타오르는 언덕 위의 성이 보인다. 저 불꽃은 오늘밤을 마지막 꽃잎을 피울 것이다.
“무슬림들은 오늘밤 마지막으로 저 불꽃을 보리라!”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는 행군에 지친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러 사기를 북돋웠다. 지친 병사들은 알람브라의 보석과 향신료, 하렘의 여인들, 온갖 향락과 꿀이 넘치는 왕궁의 약탈을 앞두고 굶주린 이리떼처럼 비릿한 침을 삼켰다.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12세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야만적인 기독교인들의 말발굽에 무슬림 형제들이 짓밟히는 것도 굴욕이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왕궁, 알람브라를 그 누구도 아닌 왕인 자신이 적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치욕을 견딜 수 없었다.
신의 섭리가 담긴 궁륭穹窿과 벽감壁龕, 생명이 샘솟는 분수와 연못, 여인의 몸처럼 굽이치는 아치와 곡선들...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들의 신을 위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을 부수고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을 세우는*’ 것은 아닐까?
주 * 꼬르도바를 점령한 기독교인들이 메스키타를 허물고 그 안에 성당을 세운 것에 노해 카를 5세가 했던 말
알람브라 점령 후 성 한복판에 건설한 카를 5세 궁전
사이프러스가 나란히 하늘을 향해 뻗은 길 끝에 나스르 왕궁 Palacios Nasaries로 가는 문이 열린다. 왕의 집무실인 메수아르의 방 Sala de Mexuar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다소 어둡고 좁다. 석회 벽에 정교하게 새겨진 아라비아 문양에서 유백색 빛이 감돈다. 이른 아침 침묵과 고요가 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라비아 문양 타일과 석회 세공이 왕의 집정執政이 머물던 자리를 지킨다. 나른한 아침 대기는 투각透刻틈에 고여 있던 한기를 몰아내고 먼지 사이로 스며든 빛은 아라베스크가 품은 식물들을 잠에서 깨운다. 무심한 창문 건너 편 집시들이 살고 있는 알바이신 마을이 하얗게 떠오른다.
메수아르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알람브라의 기둥과 들보는 촘촘한 구멍을 층층이 쌓아올린 벌집처럼 생겼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정교한 조각이다. 이렇게 작고 오목한 원추형 패턴을 모카라베Macarabe라고 부른다. 알람브라는 이처럼 작고 섬세한 세상들이 무수히 채워나간 하나의 우주다. 그것에는 무한한 반복과 떨림이 있다. 타레가Francisco Tarega의 애잔한 트레몰로tremolo는 작고 섬세한 떨림에서 나온다.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는 기하학적 문양의 반복은 영원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작은 것으로 단순화되고 단순화된 작은 것들의 반복은 확장된 전체를 지향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천정 중 일부는 벌집 모양의 모카라베(무카라나스) 양식으로 만들었다
메수아르 안 뜰Courtyard of Mexuar은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Arrayanes로 연결된다. ‘천국의 꽃’이란 뜻을 가진 아라야네스. 연못의 정면에 일곱 개의 아치가 떠받들고 있는 붉은 성루는 코마레스 탑Torres de Comares이다. 아라야네스 정원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연못, 그리고 탑이 공간을 나누며 좌우대칭을 이룬다. 엄격한 균형과 비례는 완벽한 세상, 즉 천국의 모습이다. 지상에서 구현된 천국의 모습을 아라야네스 정원에서 발견한다. 그곳의 존재원리는 조화와 질서, 그리고 완벽한 균형이다. 무어인들은 지상에서 꿈꿀 수 있는 모든 천상의 세계를 알람브라에 투영했다.
아리야네스 정원
코마레스 탑 아래는 궁전에서 나스르 궁에서 가장 넓은 대사의 방Salon de Ambajadores이다. 유수프 1세는 왕국의 존엄과 자신의 권위를 위해 이 방을 만들었다. 왕은 이 방에서 손님과 사절을 맞이했다. 벽과 천정의 상감象嵌이 현란하다 못해 경이롭다. 8천개의 삼나무 조각으로 모자이크된 이슬람의 7개 천계天界가 23m 높이의 돔 천정을 장식한다. 사면은 알라를 찬양하는 문구로 가득하다. 공간은 치밀한 수학적 계산에 의해 분할되고 빛이 들어오는 창 또한 계산된 결과에 따라 위치와 크기, 각도가 계산된다. 처음 이 방에 발을 딛은 사신들은 어디에 시선을 두었을까? 완벽한 균형과 비례, 아라베스크 장식의 현란함에 길을 방향 감각을 잃는다.
대사의 방 천정 장식
사자獅子의 정원Patio de los Leones은 왕의 내밀한 사적공간이다. 왕 외에 거세되지 않는 어떤 남자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정원의 중앙에 버티고 서있는 12마리의 사자는 네모난 유리 상자에 갇힌 채 보호를 받아야하는 가엾은 처지다. 사방을 둘러싼 124개의 대리석 기둥만이 왕이 떠난 궁전에서 사자의 위엄을 증언한다
사자獅子의 정원Patio de los Leones
모카라베의 장식의 절정은 후궁들의 거처인 아벤세라헤스의 방Sala de los Abencerrajes과 두 자매의 방Sala de las dos Hermanas이다. 이 방들은 모두 사자의 정원과 연결된다. 천정은 투명한 물방울을 파고들어 그대로 부식된 듯한 천정무늬가 끝없이 반복되고 또 변화한다. 별모양의 주름으로 설계된 돔의 둘레는 둘씩 쌍을 이룬 창이 달려있다. 바람과 햇살은 창을 통해 안팎으로 자유롭게 넘나든다. 알람브라는 미로처럼 닫힌 공간으로 보이지만 밝고 개방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을 연결하는 회랑은 안과 바깥으로 트였다. 부드러운 곡선이 궁宮의 바깥을 감싸고 기둥은 직선의 단순함과 곡선이 완곡함이 조화를 이룬 원통형 구조다. 벽면은 한 치 빈틈없는 세공으로 마무리되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지만 단순하고 일관된 창의 배치, 그리고 바깥 풍경과 서로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벽을 장식한 아라베스크 문양
사자의 방은 또 다른 정원인 파르탈Jardines del partal로 나갈 수 있다. 귀부인의 탑Torre de las damas이 흔들리는 연못 주변에는 수많은 꽃들과 나무들이 자란다. 놀랍게도 알람브라 연못의 모든 물들은 쉼없이 흐른다. 골짜기도 아닌 100m가 넘는 언덕에 수천의 사람과 짐승을 먹이고 씻길 물을 확보한다는 것은 우물이나 빗물만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무어인들은 100m가 넘는 언덕에 성채를 세우며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녹은 눈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빛과 함께 물은 이슬람 건축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모든 낙원의 중심에는 오아시스, 곧 물이 흘러넘치는 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은 영원히 반복된다.
파르탈 정원
알바이신 언덕과 알람브라 사이에 가로놓인 아사비카 계곡에서 더운 바람이 실려 왔다. 적의 사자가 그라나다 외곽에서 최후통첩을 보냈다. 만약 성을 버린다면 목숨을 살려주고 파괴와 약탈에서 알람브라를 지켜주겠다는 이사벨 여왕의 마지막 서신이었다. 무함마드 12세, 보압딜Boabdil은 최후의 순간까지 망설였다. 끝까지 목숨을 내걸고 싸워 알람브라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아니면 굴욕을 무릅쓰고 기독교인에게 성城을 내줄 것인가? 선대의 왕들은 무엇 때문에 몰락하는 무어의 마지막 영지에 장엄한 성을 세우고 그 빗장을 자신에게 넘겼는가? 영원을 꿈꾸는 왕조의 욕망은 채울 수도 채워지지도 않기 때문에 슬프고 운명을 따라야 하는 왕의 영혼은 무참하다.
벨라탑에서 내려본 알카자바
무함마드 12세는 말안장에 올랐다. 왕의 뒤를 따르는 나스리아 왕국의 신하들과 왕비 후궁들의 눈에서는 비통에 가득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이 순간 왕보다 슬픈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차마 겉으로 내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패배자에게 베풀어 줄 자비 따위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왕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문을 나서는 마지막 말발굽이 떨어지기 전 결국 왕의 눈에서도 핏물처럼 진한 눈물이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왕과 백성들은 붉은 석양이 비치는 저 남쪽 언덕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 알헤시라스로 향했다. 무함마드 12세의 일행이 언덕에 서자 태양은 알람브라 서쪽으로 기울고 성은 그 어느 때 보다 붉게 물들었다.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왕국을 잃은 것보다 슬픈 것은 이 아름다운 궁전을 다시 못 보는 것이다.”
왕이 내뱉은 마지막 이 탄식이 바로 그 유명한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el ultimo suspiro del Moro’이다.
그라나다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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