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타클라마칸 일기 7. 말에 대하여

하피즈 2010. 9. 17. 11:41

 

 

 

 

  허톈 시에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50km까지 띄엄띄엄 마을도 있고 사람들도 제법 산다. 모두 허톈 강 덕분이다. 강 유역을 따라 너른 습지가 펼쳐지고 그 뒤편에 마을들이 자리한다. 도로에서 벗어나 강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무료하게 도로를 따라 걷느니 조금 돌더라도 기왕이면 마을을 따라 걷기가 한결 덜 지루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도 무시할 수 없다

 

 

 

 

 제법 키가 큰 호양나무들이 늘어선 방죽을 따라 마을로 들어간다. 군데군데 양떼를 가둔 울타리가 보이고 인근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위구르 사내 둘이 뒷짐을 진채 양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두 사내의 시선은 분명 양떼를 맴돌았으나 정확히 그 시선이 무엇을 살피는지 그 대상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 둘 중 덩치가 크고 사내가 양 한 마리를 덥석 메쳐들고 경운기를 개조한 듯한 차량에 싣는다. 그들을 멀거니 쳐다보다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묻는다.


“무엇을 하는 게요?”

"새끼를 밴 양을 찾아 차에 싣고 있소.”


 간단히 두 문장으로 요약했으나 이 정도까지 의사소통이 되는 과정은 참으로 지난했다. 우리는 위구르 말은 물론 중국어조차 할 줄 몰랐고 위구르 사내들도 위구르 말밖에 구사할 줄 몰랐다. 겨우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새끼 밴 양을 속아낸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우리가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은 그들이 새끼 밴 양을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있다. 좀 의외였지만 위구르인들 중에는 중국말, 즉 북경어와 한자(간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이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그런 현상은 심해진다. 이건 문맹과는 차원이 좀 다른 이야기다. 위구르인들에게 표준 북경어란 외국어나 다름없다. 자기 민족이 아닌 중국의 다수인 한족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다. 물론 중국 정부에서는 위구르인과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북경어를 가르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학교에서는 북경어로 수업하고 가르친다.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로 말하고 쓰게 했던 일제 강점시대와 같은 논리다. 반세기 전 조선반도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곳에서 사회통합과 민족단결이라는 이름으로 득세한다. 물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주류인 한족漢族의 지배를 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이며 효율적으로 다지기 위해서다. 그런 중국 정부의 노력은 제법 결실을 거두어 위구르 젊은이들은 거의 북경어로 말하고 쓸 줄 안다.

 

 

양털을 깍는 위구르 노인

 

 

   그러나 아직도 다수의 위구르 인들은 의도적으로 표준어인 북경어를 무시하고 그들의 언어인 위구르어로 말하고 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지방 방송도  물론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위구르 인들에게 그들의 말은 단순한 말 이상의 의미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언어는 바로 민족의 정체성과 바로 통한다. 위구르 말이 사라지는 순간 위구르 민족은 존재할 수 없다. 중국에서 조선말이 사라지는 순간 조선족도 사라진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족은 중국인처럼 생각하고 중국인처럼 행동하며 중국인이라고 스스로를 여긴다. 외모로 말한다면 한족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조선족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좀 먹고 살만해졌다고 잘난 척해대는 남한이나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맞짱뜨는 북한에게도 조선족은 이방인이다. 어쩌면 조선족이 중국인임을 자처하는 이유는 안에 있기보다 바깥에서 주어진 필연일지도 모른다.                

 

 

위구르 아이들

 

 

  가이드를 맡은 조선족 송선생은 북경어도 못하는 불온한 위구르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주류사회에 저항하는 위구르인들의 곱지 않은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조선족인 송선생이 위구르인을 바라보는 한족의 시선은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아 어쩐지 불편하다. 물론 나는 구태의연하며 배타적이고 끔찍한 민족주의를 옹호할 뜻은 티끌만치도 없다. 오히려 통합과 단결을 이야기하며 교묘하게 인종과 민족을 구분해 차별하고 부당하게 이익을 갈취하는 패권주의를 경계하고자 함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힘으로 억누르려는 모든 불의를 반대할 뿐이다.   

   

 

다마스쿠스의 차장수 

 

 좀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간혹 이슬람권의 나라를 여행 하다보면 그 곳 사람들이 한국에서 어떤 말을 쓰냐고 묻는 때가 가끔 있다. 처음에는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생각했다.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을 쓰는 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한국말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상식’은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았다. 동아시아 지도에서 한반도가 빠져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국말은 존재 자체가 오히려 낯설다. 마치 화성인의 존재처럼...

 

 

다마스쿠스의 이발사

 

 

   우리가 완전히 독립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해도 공용어는 중국어나 일어이며 방언정도 한국어를 쓰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이쯤에서 내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으나 자제하고 거꾸로 생각한다.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쓰고 아프리카 국가의 지배적 언어 역시 프랑스어다. 영어도 조금 섞이긴 했지만...이들 국가들은 식민지였거나 거의 유사한 지배를 받았다는 역사적 공통점을 갖는다. 일본의 식민지 혹은 500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나라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유지해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한반도를 지배했던 양반들이 한글을 업신여기고 그토록 중국문자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또한 ‘Hi, Seoul’이라는 국적 불명의 언어를 뻔뻔히 말하며 죽도록 영어에 몰빵하는 대통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하려는 언어는 ‘나쁜 말’이다. 생각의 방식을 강요하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쓰던 한자가 그렇고 식민지 조선의 일본말이 그랬으며 패권을 가지려는 영어가 그렇고 위구르인과 티베트인을 억압하는 중국말이 그렇다. 말에는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담겨있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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