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두 소녀
주말에 부암동에서 자하문을 지나 서촌으로 해서 북촌까지 이르는 길을 다녀왔습니다. 부암付岩동은 세검동의 부침바위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인왕, 북악, 북한의 기운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한북 정맥의 요지입니다. 산세가 샌 탓인지 집과 건물들이 한결 낮게 보입니다.
길은 사직에서 출발합니다. 사직, 경복궁, 종묘는 서울 명당의 중심축을 이루는 요지입니다. 사직은 그 중 오른편이 위치합니다. 인왕산이 뒤를 버티고 있지요. 율곡선생과 신사임당 동상이 나란히 서있는 사직공원을 가로 질러 산 쪽으로 올라가면 종로구 행촌동입니다. 제 본적이 종로구 행촌동인데 지금까지 서울 어느 언저리인지 몰랐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행촌동에 와본 셈이지요.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는 제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라는 이름의 옛집
400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 앞에 제법 오래 되어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 서있습니다. 초석에 ‘딜쿠샤DILKUSHA 1920’ 이렇게 써있네요. 미국인이 지은 집인데요, 생뚱맞게도 낙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도 지명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상당히 쇠락한 낙원입니다.
윤동주 시인 전시관
조금 더 산을 따라 올라가면 <윤동주 문학 전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쌀 창고 같습니다. 네모난 건물에 현판과 현수막 하나만 덜렁 걸어 놓은 채 철문은 닫혀 있군요. 울컥했지만 이렇게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겠지요?
시인의 언덕
큰 길을 건너면 청계천 발원지-진실인가요?-라는 표지석이 보이고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입니다. 음... 시인의 언덕이라. 언덕 아래 오밀조밀한 집들이 보이는데 시인이 젊었던 시절 하숙을 했다고 하는 군요. 시인이 젊었던 시절 저 젊은이들처럼 언덕에 앉아 서울 시내 풍경을 바라봤을지도 모릅니다.
부암동 갈림길
부암동 길은 한적한 골목과 옛 건물, 아기자기한 집 볼만합니다. 창의문, 흥선대원군의 석파정과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유명하지요. 특히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 꾼 이야기를 안견이 <무릉도원도>로 그렸다고 해서 더욱 기대가 큽니다.
길 안쪽으로 접어들어 거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를 볼 수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때문일까요? 주변 풍경은 다소 실망입니다. 무릉도원은 어디로 이전한 것인가?
무계정사
지붕에 잡초가 무성한 작은 고가 한 채가 드문드문 찾아오는 길손들은 맞이합니다. 버려졌다고 표현해도 좋겠지요. 어느 한 구석도 ‘관리’되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계정사
무계정사 바로 앞 현진건 집터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600년 동안 살아남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는 사정이 그래도 나은 편이죠. 몇 해 전 헐린 현진건 가옥은 흔적도 없이 집터만 황량하게 남았으니까요. 100년도 못 버틴 셈입니다. 잡목이 우거진 공터에 공영주차장을 반대하는 부암동 주민들의 현수막만 말없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래도 부암동에는 환기미술관과 클럽 에스프레소와 같은 크고 작은 카페 같은 보고 쉴 새 없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부암동을 찾은 연인과 가족들로 붐비더군요. 버려진 무릉도원과 비교됩니다.
개 한마리가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부암동에서 청와대 뒷길 삼청동을 따라 내려옵니다. ‘컬쳐 브릿지’라는 이름의 입구가 독특한 갤러리와 그 앞에 꽤 잘 꾸며진 공원이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사건이 일어난 현장, 바로 궁정동 안가安家 자리입니다. 김영삼(??) 시절에 안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름처럼 안전할 수 없었던 가옥입니다.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역사를 증언할 현장을 잃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숨기고 지우는 것보다는 솔직한 인정과 반성이 현재를 위해서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떳떳하고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요?
삼청동, 원서동 뒷 길에는 크고 작은 오래된 가게들이 많습니다. 몰론 오래 된 건물에 새로 만든 빈티지 카페들도 나름 독특한 거리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옛 것과 새로운 것들이 마구 뒤엉켜 정신이 혼미합니다. 수 백 년 넘은 사적 뒤로 수 십 층짜리 고층 건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섭니다. 이것저것 갖은 이유를 둘러대지만 목적은 결국 단 한 가지입니다. 아시죠? ^^
동십자각과 새로지은 옛 한국일보사 자리에 들서선 건물
<론니 플래닛>은 이런 서울의 모습을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 또 어떤 기자는 ‘영혼이 없는 도시’라고 비꼽니다. (서울 시민이 무슨 좀비입니까? 영혼이 없다니...) 이런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분명 곰곰이 가슴에 새겨둘 필요는 있습니다.
함께 걸었던 어린이가 현대 미술품이 전시된 한 화랑을 둘러보고 나온 뒤 이런 말을 하더군요.
“뭐가 있긴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어...”
피에타...
어른들이 둘러 댔습니다. 예술이란 그런 거란다. 어른들도 잘 몰라...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어린이의 솔직한 발언에 어른인 저도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예술’의 자리에 ‘서울’을 대신 갖다 붙여 봅니다. 뭐가 많긴 한데 정체를 모르겠어...
알 ?
우리도 뭔가 뭔지 모르고 알쏭달쏭한 짓을 해온 게 아닐까요? 진짜 오래된 것은 내팽개치고 옛 것처럼 보이는 것에 홀린 것은 아닌지? 마치 한복은 버려두고 한복인지 양복인지 모를 야릇한 옷을 우리 옷이라 우기는 건 아닌지?
부암동 앞 거리
헌 책방 대오서점
대오서점 주인 할머니
사루비아 다방
옛 이발소
중국집 영화루
종합설비...
떡볶기와 할머니...올해 춘추 아흔 여섯이십니다.
<보안여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중 하나
담장에도 봄은 찾아 옵니다 ^^
한옥 게스트하우스
금 밖으로 나오면 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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