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와 헤밍웨이 그리고 쿠바
슬픔과 고통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받고 위로받는다.
- 후지와라 신야
아바나 중심가 까삐똘리오 앞
지상에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 국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과 살사 그리고 쿠바 산 최고급 시가 코히바Cohiba의 향기가 베어있는 거리, 월 200달러에 불과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밤 새워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20세기 초반 만든 분홍색 뷰익Buick을 타고 캐리비안 해안을 질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21세기에 만날 수 있는 쿠바이자 아바나의 풍경이다.
거리에서 밥 말리Bob Marley의 얼굴 보다는 ‘체Che’의 얼굴이 더 자주 만난다. 시장 좌판은 비어있고 시민들의 호주머니는 한없이 가볍다. 혁명이 길고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균열을 넘어 소멸의 단계에 이르렀다. 대서양에서 불어온 짜고 습기 찬 바람이 한 때 푸르던 것들의 가난한 어깨를 어루만진다. 바람은 몰락해가는 도시, 아니 부활 중인지도 모를 도시의 빈틈에 잠시 머물렀다 야자 숲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바람의 흔적을 따라 바다를 향해 걸었다. 아바나에서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10km쯤 떨어진 작은 어촌 꼬히말Cojimar.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라고 스스로 밝힌 한적한 마을이다. 항아리처럼 오목한 항港의 깊숙한 안쪽에는 ‘헤밍웨이’라는 이름을 단 어선들이 몇 척 보인다. 작기는 해도 엔진이 탑재한 어엿한 발동선들이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노를 저었을 만한 작은 배들도 간혹 바다를 오간다. 헤밍웨이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어부가 자신의 배 스크류를 녹여 만들었다는 동상과 헤밍웨이 사진 몇 장 걸어놓은 바닷가의 레스토랑 뿐...어쩌면 모든 소설의 배경이란 꼬히말처럼 심심하고 적막하기에 빈 것을 채워 넣을 그 무엇인가 필요한 곳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끝내는 상어에게 모두 뜯겨 항구로 돌아와야 하는 산티아고 노인을 통해 헤밍웨이는 자신의 운명을 말한다. 결국 그토록 사랑했던 쿠바와 비정한 국제정치에서 버림받아야 했던…
호텔 암보스 문도스 Ambos mundos
아바나에는 헤밍웨이가 자신의 집을 구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호텔 암보스, 다이끼리Daiquiri를 즐겨 마시곤 했던 바 플로리디타Floridita 그리고 7년産 아바나 클럽에 레몬과 코리앤더를 곁들인 모히또를 파는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가 지금도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그 곳에는 한결같이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미국인이지만 쿠바를 더 사랑했던 남자 헤밍웨이는 1928년부터 추방되던 1961년까지 여행할 때를 제외하곤 줄곧 쿠바에 머물며 작품을 썼다.
1차 대전에 직접 참전해 부상을 당했고 스페인 내전에는 종군 기자로 참여했으며 쿠바 혁명의 와중에 혁명군을 지지했으니 헤밍웨이는 타고난 전쟁 운運이 있는 작가인 셈이다. 첫 번째 전쟁에서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스페인 내전에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그리고 그에겐 마지막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쿠바 혁명 후에는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작가에게 쿠바에서의 추방은 낙원 아니 인생의 마지막 피난처에서 추방당한 것과 같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결국 아이다 호에서 엽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로부터 5년 뒤 헤밍웨이처럼 역시 죽음을 예감하며 쿠바를 떠난 이상주의자가 또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굵고 짧게, ‘체Che!’ 세상을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권력 대신 혁명을 선택한 유일한 인물.
1928년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학도의 길을 걷던 에르네스토-Ernesto Che Guevar-는 로르카와 네루다, 베를렌과 보들레르의 시를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대학 시절과 졸업 후 두 번에 걸쳐 남미 전역을 여행하며 체의 인생은 의사에서 혁명가로 변화한다. 인간과 사회의 질병에 대한 깊은 연민과 분노를 느낀 것. 체는 과테말라에서 미국 CIA와 다국적 기업이 저지른 군사 반란과 맞서 싸우며 “혁명적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으며, 쿠바에서 싸웠다”.라는 체 자신의 말처럼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1960년 3월 5일 체 게바라, 알베르토 코르다 Alberto Korda
라 쿠브르 호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체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
20세기에 가장 복제가 많이 된 인물 사진이다.
60년대를 살았던 청춘들은 체와 비틀즈에 세례를 받았다. 한 사람은 혁명을 격정적인 음악처럼 또 다른 이는 노래를 혁명처럼 쏟아냈다. 혁명 직후인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사르트르는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체를 평했다.
베레모에 빛나는 붉은 별과 굳게 다문 입술,거칠게 자란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칼, 불타는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 코르다Korda-쿠바에서 활동하며 체와 피델의 사진을 남긴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찍은 사진을 보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가장 깨끗하게 살아남은 혁명가’인 체에게 대중들은 열광했다. “창공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시대(주1)”는 속절없이 저물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체는 그래서 더욱 빛나는 별이자 희망이 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다국적 자본을 배후에 둔 대중 문화권력은 체에게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거세 시키고 단순한 문화 이미지 상품으로 그를 전락시킨다. 티셔츠와 지갑과 혁대, 맥주와 심지어 콘돔에 이르기까지 ‘체의 이미지’는 무차별적으로 살포되고 소비되었다. 쿠바에서도 ‘체’는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어느 곳에서나 체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쿠바정부는 정작 체의 책과 사상을 파는데 인색하기 짝이 없다.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 시설 만든 초콜릿 공장/ 바라코아
불과 10년 남짓 쿠바에서 머물렀지만 그 누구 보다 쿠바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체. 그를 만나기 위해 아바나에서 남동쪽 끝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까지 12시간 동안 꼬박 밤을 새워 달렸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피델의 카스트로의 정치적 고향이자 쿠바 혁명이 시작된 곳이다. 1953년 당시 이 지역 의원이자 변호사였던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의 군사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자 무모하고 대담하게도 몬카다 군 병영을 습격한다. 물론 이 무모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카스트로는 감옥에 갇힌 뒤 사면되어 멕시코로 망명을 떠난다.
1956년 멕시코. 체와 카스트로는 이 곳에서 운명적으로 만난다. 단 하루 동안 밤새워 토론한 두 사람은 혁명 동지가 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불과 82명의 혁명 전사를 태운 레저용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잠입하지만 그나마도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되어 불과 10명의 생존자를 이끌고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달아나며 시작된 이상한 혁명. 그러나 이 이상한 혁명은 4년 만에 거짓말처럼 성공한다. 당시 총탄 자국이 선명한 몬카다 병영은 지금은 내일의 쿠바를 만들어 나갈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다시 아바나로 여정을 거슬러올라 산타클라라Santa Clara에 도착했다. 여행자들이 산타클라라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체 게바라 때문이다. 위치로 따지면 쿠바의 배꼽 쯤에 해당하는 산타클라라에서 쿠바 혁명은 돌이킬 수 없는 전기를 맞는다. 바티스타 정부군의 무기 열차를 탈취해 결정적 승기를 거머쥔 것. 바로 이 전투를 이끈 이가 체 게바라다. 1997년 볼리비아 정부로부터 체의 유해를 인도받은 쿠바 정부는 이 곳에 체와 혁명동지들을 안장하고 광장과 체의 기념비, 전시관을 조성했다.
혁명 후 체는 잠시 산업부 장관, 즉 관료의 길을 걷지만 곧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체는 ‘프롤레타리아의 조국’ 소비에트 역시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임을 알고 맹렬히 비난한다. 현실 정치인일 수 밖에 없는 카스트로와의 결별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상주의 혁명가를 받아 줄 조국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1965년 체는 카스트로에게 긴 편지를 남기고 쿠바와의 작별을 고한다.
산타클라라 체의 기념탑에는 체가 마지막으로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전문이 비문으로 새겨져 있다.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또한 생각한대로 살아온 체가 남긴 한 마디…‘승리할 때까지,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Hasta la victoria Siempre, Pattria O Muerte!’를 남기고…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정글, 라 이구에라La Higuera에서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체는 혁명가로 살았다. 시대가 혁명을 원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체가 혁명을 원했다.
체의 기념비/ 산타클라라
쿠바는 거대한 화석化石과 같다. 그 안에 살아있는 시간이 갇혀 있다.외부 세계의 봉쇄와 내부로부터 고립이 시간을 그 안에서 맴돌게 만든다. 물질 세계의 시간은 혁명이 완성된 59년 1월에 멈춰있다. 쿠바노Cubano들은 반쯤 허물어진 건물 속에서 50년대식 미국산 쉐비와 캐딜락을 타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시간의 둘레를 맴돈다. 관광객들은 쿠바에서 복고를 즐기지만 이 섬의 주민들에겐 숙명이다. 59년으로 밀봉된 물질세계의 시간과 함께 21세기까지 유일하게 힘겹게 버티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를 만날 수 있다. 무늬만 사회주의인 국가인 중국이 겨우 도와주는 시늉을 하지만 그들은 돈을 쥐고 형식적 사회주의라는 둑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1959년부터 헤밍웨이가 쿠바로부터 추방당한 약 2년 동안 체와 헤밍웨이 이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여행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외국인으로 쿠바에 살았던 두 거인의 만남. 서점과 옛 책을 뒤져 겨우 찾아낸 잡지에서1960년 체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1960년 제1회 헤밍웨이 낚시대회에서 체와 그의 어머니’라는 설명이 남겨진…
이 날 낚시대회가 끝난 후 헤밍웨이가 모히또를 즐겨 마셨다는 라 보데기따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에서 체가 쿠바산 시가 연기를 맛있게 내뿜으며 헤밍웨이와 함께 아바나 산 럼주를 함께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저녁 놀에 붉게 물들기 시작한 말레꼰을 걸으며 엉뚱한 상상에 잠겨본다.
제1회 헤밍웨이 낚시대회에 참여한 체와 그의 어머니/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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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Die Theorie des Romans>> 중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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